눅 17:20-37 하나님 나라 지금 여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20~21절)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인자의 오심에 대해 가르치신다(22~37절).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17:20)은 인자가 오는 것(18:8)과 분리되지 않으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고 미래에 완성될 것임을 설명하신다.
1.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는가?(20~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하는지 예수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민족의 해방을 고대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개입하시는 때라고 이해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때를 궁금해 하던 중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10:9; 마 4:17; 막 1:15).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확실한 표적을 동반하면서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확연히 관찰되고 입증될 수 있는 나라,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는 나라를 기다렸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관찰할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저기서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현상과 초자연적인 표적을 시작으로 오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같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나라도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에 실현되는 나라를 소망했으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종류의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해 있다(21절).
“너희 안에(엔토스 휘몬)”는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바리새인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실현되고 있다. 지금 바리새인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임해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관점 때문에 그들 가운데 실현되고 있는 나라를 인식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도록 의도하신다. 예수님이 현재 활동하시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다.
2. 인자가 임하는 장소(22~25절)
예수님은 갑자가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다. 제자들은 인자의 날들 중 첫날을 보려 하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22절). 인자의 “날들”은 재림으로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하루는 그 시대의 첫날을 의미한다(행 20:7).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과 교회)은 핍박을 받고 극심한 시련을 겪을 것이다. 예상보다 긴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원하지만, 그런 낙원을 보지 못할 것이다.
기다림에 지친 신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는 말에 현혹되기 쉽다. 고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미혹되기도 쉽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기 있다 여기 있다고 해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아야 한다(23절). 왜냐하면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저쪽으로 번쩍이듯이 인자의 날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3~24절은 재림에 대한 전형적인 가르침이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지역에 성육신하셨지만 재림 때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오신다. 번개 번쩍이면 이쪽과 저쪽 지역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자의 날도 우주적 현상이고 보편적인 날이다. 그리고 번개가 갑자기 번쩍이는 것처럼 인자도 생각하지 못한 때 갑자기 오실 것이다. 제자들과 교회도 잘못된 소망과 관점을 갖고 있으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오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난을 없애줄 나라가 특정 지역에 특정 사람을 통해 임하는 줄로 착각할 수 있다.
제자들이 인자의 날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인자이신 예수님의 운명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데이)”를 사용하셔서 인자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소명인 사실을 강조하신다. “이 세대(완악한 이스라엘)”는 욕망에 따라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이기적 목적을 추구하고 예수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인자의 고난과 십자가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경험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고난이 와도 미혹되지 않는다(행 14:22).
인자의 재림은 우주적인 사건이다. 즉, 특정 지역과 시점에 국한하여 맹신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고난을 통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기복적인 관점에서 종말을 기다린다면 더욱 미혹되기 쉽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난과 수치를 인내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소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인자의 날에 분리되는 운명(26~37절)
인자의 날을 강조하신 예수님은 노아의 날과 롯의 날에 벌어진 모습을 근거로 인자의 재림 때 일어날 상황을 예고하면서 이와 같은 경고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신다(26~37절). 인자의 날에는 노아의 날에 일어난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26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했다. 이런 행위 자체는 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에 몰두하다가 영원의 가치에 무관심했다. 일상에 휩쓸려 살아갈 때 홍수가 나고 말았다(27절). 또한 인자의 때는 롯의 때와 같다.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28절). 식생활과 상업과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은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바쁘고 필수적인 일상이 하나님의 경고를 잊게 하고, 영적인 긴장감을 잃게 만들 수 있다. 롯이 소돔에서 나갈 때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처럼 내려 그들을 멸망시켰다(29절). 미래에 임할 인자의 날에도 그런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30절).
26~30절은 인자의 날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한 반면, 31~33절은 인자의 날에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강조한다. 인자의 날에는 지붕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집안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하고, 밭에 있는 사람은 뒤로 돌아서지 말고 도망해야 한다(31절). 뒤를 돌아보는 것은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원인이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므네모뉴에테, 생각하라)” 는 31절, 즉 창세기 19:26에 기록된 비극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단지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족하지 않도록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롯의 아내와 같이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인자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롯의 아내처럼 소유를 목숨처럼 지키려 하면 목숨을 잃고 만다(33절). 소유가 삶의 전부가 되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중요한 영생에는 냉담하게 된다.
34~36절은 인자의 날에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이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 두 남자가 함께 자다가 한 명은 올라가고 한 명은 그대로 있게 된다(34절).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다가 한 명은 올라가고 한 명은 남게 된다(35절).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집에 살아도 인자에 대한 생각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제자들이 “주여 어디입니까?” 라고 물으며 인자가 임할 장소에 대해 질문한다. 예수님은 썩은 고기를 먹는 독수리가 주검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 그림으로 대답하신다(37절). 주검을 찾는 독수리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이 그림은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게 인자가 오실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 수 있는 때와 징조들을 물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함께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신다. 이제 그들은 그 나라의 임재를 깨닫기 위해 다른 곳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과 그분의 말씀을 보아야 했다. 인자가 임하실 때는 세상 어디에 살든지 누구든 알 수 있도록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특별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 있다” 혹은 “저기에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왕으로 계신 곳이면 언제나 어디에나 임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는지 묻는다. 언제 로마에서 독립하여 세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어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다고 하신다. 지상의 국가처럼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의 내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대화하고 계신 예수님과 함께 와 있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권능과 행하심,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예수님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홀연히… 예수께서 심판주가 되시기 전에 인류를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대에서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겠지만, 이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통치를 촉발할 것이다. 시집가고 장가가던 일에 몰두하던 노아의 시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집 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롯의 시대에 물과 불의 심판이 홀연히 찾아 왔듯이, 인자의 날도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홀연히 끝날 것이다. 나만 예외일 수 없다. 그때는 이미 늦다.
-그 나라가 완성되는 “인자의 날”에 관해 가르치신다. 인자의 날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했지만, 제자들은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고난과 십자가의 도다. 그 시간이 지난 후 인자의 날은 임할 것이다. 주님은 그날이 번개처럼 갑자기 심판으로 임할 것임을 노아의 때와 소돔의 때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때 사람들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의 일락에 취해 살다가 갑작스럽게 심판을 맞았다. 방심하여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인자의 날은 도래한다. 인자의 날을 유념하며 깨어 십자가의 도로 행하는 것이 그날을 준비하는 지혜다.
-하나님 나라는 에누리 없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는 더는 기회가 없다. 인자가 임하는 그날엔 뒤돌아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두고 온 것을 아쉬워하여 돌아본 롯의 부인이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순간과 육신과 땅의 것을 만족시키는 일에 집착할 때, 그날 영원과 영혼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날엔 남은 자와 데려감을 입은 자로 나뉠 것이다. 구원 얻는 자와 심판받는 자가 갈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보다 하나님 나라 일에 참여하였는지,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하였는지로 판단하실 것이다.
-인자의 날이 임할 때는 육신의 관계도, 땅의 물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소유에 대한 욕심으로 뒤돌아보는 것은 불행을 초래한다. 자칫 영원과 영혼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 롯의 아내의 일이 교훈을 준다. 그녀는 두고 온 것이 아쉬워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어떤 곳에 있어야 심판을 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자인지가 중요하다고 하신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의인이 있는 곳에는 구원이 임하고 악인 있는 곳에는 심판이 임한다.
*주님, 주님 다시 오실 때를 신실하게 맞이하도록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이루어지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다, 언제라도 오시리라 믿음으로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