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메시아에 대한 편견, 서기관들의 외식, 가난한 과부의 전부, 전심, 진실… [눅 20:41-21:4]
 – 2025년 04월 09일
– 2025년 04월 09일 –
눅 20:41-21:4 메시아에 대한 편견, 서기관들의 외식, 가난한 과부의 전부, 전심, 진실…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 중 마지막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에 대해 질문하시고(41~44절) 서기관들의 행위를 배우지 않도록 경고하신다(45~47절). 그리고 부자들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신다(1~4절). 과부를 칭찬하는 장면(21:1~4)은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20:45~47)과 대조된다.
 
기록자를 뜻하는 “서기관”은 구약에서 왕궁, 성전, 지방 정부의 업무를 수행했다. 포로기 이후에는 지역의 법적인 업무를 담당하거나, 성전에서 성경을 필사하고 법적 문서를 작성하거나, 왕궁에서 자문자로 활동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재정, 정책, 행정과 관련된 임무를 맡은 최고위직 공무원이었고(왕하 22; 렘 36:10) 총무와 기록자의 일을 맡았다(삼하 8:16~17; 20:24~25; 왕상 4:3). 지역 서기관들은 지역 지도자들의 행정을 보좌하고 정치적 식견을 제공하고 세금을 관리했다.
 
또 성전 서기관들은 문서를 기록하고 보존했으며, 성경, 신앙의 규범, 제사장의 계보 등을 필사하는 일을 수행했다. 레위인들이 서기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히 당시 헬라화의 도전 앞에서 서기관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학자로서 모세의 글을 해석하고, 신앙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유대 백성은 제사장들이 헬라화의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한 반발로 서기관들의 성경 교사와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존중했다. 1세기의 서기관들은 유대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높은 권위를 누렸으며, 그 수도 점점 증가했다. 서기관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과 연대했고 소수는 사두개인들과 함께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각각 율법이나 법적인 해석의 전문가들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마 12:38; 23:2; 막 7:1~23; 눅 5:21).
 
 
 
1. 메시아의 권위에 관한 질문(41~44절)
이제까지 질문을 받던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부를 수 있는지 질문하신다(41절). 본 문단의 처음과 끝(41, 44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포스)”라는 의문사를 사용해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지 물어보신다(41, 44절).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41절). 다윗의 주(퀴리오스)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44절)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은 시편 110:1이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다윗의 시임을 확인하기 위해 “다윗이 시편에서 말한다”라고 표현하신다.
 
다윗은 주(여호와)께서 “내 주(메시아, 그리스도)”께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삼기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하셨다고 말했다(43절). 예수님은 다윗이 지칭한 내주를 그리스도라고 보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나단 언약에 근거하여 “다윗의 아들”(18:38)이 이스라엘의 왕과 구원자로 등장할 것을 기대하였다. 유대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인데 다윗이 어떻게 자기 후손(그리스도)을 “내 주”로 부를 수 있는가? 사람인 다윗의 아들(또는 메시아)이 은유가 아닌 실제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해석은 시편 110:1 다윗의 아들이 “주”의 신분과 “그리스도”의 정체를 동시에 갖고 있을 때만 가능한 논리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백성을 구원하시기에 그리스도가 되고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기에 주가 되신다. 다윗의 아들과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사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신적 존재, 즉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이지만 다윗이 섬겨야 하는 주(42, 44절),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계신다.
 
이 단락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던진 질문,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0:2)”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니의 보좌 우편에 앉은 주의 권위로 성전을 청소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하나님)와 다윗의 아들(인간)이 될 수 있는가? 다윗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예수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이 성육신의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2. 서기관들의 문제(45~47절)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율법 교사들)을 주의하도록 경고하신다(45~47절). “삼가다(프로세코)는 “조심하다, 경계하다”의 의미로 제자들이 서기관들의 행위를 배우지 말라는 경고를 위해 사용된 동사다(12:1). 예수님은 제자들이 경계해야 할 서기관들의 모습을 네 가지로 요약하신다.
 
서기관들은 특유의 긴 옷(정복) 입기를 원하고 세 가지 활동을 사랑한다. 먼저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에 신경 쓴다. 서기관들의 정복은 길고 늘어진 형태의 옷으로 명예와 고귀함을 상징했다. 이어서 나타난 세 가지 모습은 “원하다, 좋아하다” 동사에 연결된다. 둘째,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한다. “인사(아스파스무스)”로 번역된 단어는 아부하는 자들의 과장된 칭송이 담긴 인사다. 서기관들이 길을 걷거나 시장에 등장하면 사람들은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셋째, 서기관들은 회당에서 으뜸의 자리(프로토카쎄드리아)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 이 자리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앞쪽에 배열된 높은 위치의 의자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14장에서 식사 초대를 받아 높은 자리를 선택한 사람이 낮아질 것을 경고하셨다(14:7, 11). 넷째, 서기관들은 잔치의 첫 번째 자리(프로토클리시아)를 좋아한다. 식사 초대자는 서기관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영예로운 자리를 제공한다.
 
네 가지는 일상에 나타난 서기관들의 오만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선호하고 영광 얻기를 추구하는 점에서 교만하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서기관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네 가지 행위 외에 탐욕과 보여주기식의 문제를 추가한다(47절). 율법 전문가들로서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을 긍휼의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는데도 과부의 재산을 삼켰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는 공동체와 조교 지도자들의 보호 없이 생존하기 어려웠다. 또한 서기관들이 길게 기도하는 것은 “보여주기(프로파시스)”를 위함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고귀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웃사랑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일삼을 수 있었다(18:9~14).
 
서기관들의 문제를 요약하면 외식과 위선이다. 그들은 신앙과 하나님을, 이득을 챙기는 도구로 활용했다. 그것으로 명예를 구하고 전문 지식과 신분을 부를 축적하기 위해 활용했다. 기도의 손을 높이 올리고 기도의 소리를 크게 할수록 과부는 더욱 심하게 속고 착취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보여주기 위해 길게 기도할수록, 삼키는 재산이 많을수록, 그들이 받게 될 심판도 엄중할 것을 경고하신다(47절; 참고, 11:37~52). 여기서 언급하는 심판은 종말에 확실하게 주어질 것이지만, 심판의 시기가 종말에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직분을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서기관들의 태도를 닮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누가’는 이미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로 평가했다(16:14). 지도자의 역할은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들을 보하고 섬기는 것이다. 경제적 이득에 맞추어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장차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는 지름길이다.
 
 
 
3. 부자들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21:1~4)
서기관들의 죄와 운명을 언급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여 말씀하신다(3~4절). 예수님은 부자들이 성전의 건물 중 여인들의 뜰에 놓여 있던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셨다(1절). 이어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도 보셨다(2절). 렙돈(렙톤)은 당시에 가장 작은 가치의 동전이었다. 학자들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약 100분의 1 또는 132분의 1의 가치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일당이 10만 원이라면 두 렙돈은 1,000~1,500원에 해당한다. 부자의 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액수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헌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소유한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생활비(비오스)”로 번역된 단어는 “생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녀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드렸기에 어떻게 살 것인지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다. 한 렙돈을 드릴 수도 있었으나 가진 전부를 드렸으며, 과부의 헌신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대변한다.
 
명예를 중시하던 당시 세계에서 부자들에게 예배는 명예를 확인받고 하나님의 복을 자랑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물의 가치를 금액 자체가 아니라 헌신의 정도 또는 희생의 크기로 평가하신다. 경제적 가치 면에서 따지면 과부가 낸 헌금을 가장 크고 귀한 것으로 평가하신다. 만일 본문의 부자들이 앞 단락(20:45~47)의 서기관들을 포함한다면 제자들에게는 백성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경계의 대상인 반면, 모든 것을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신은 그들이 수용하고 따라야 할 제자도의 모델이 된다.
 
 
 
나는?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질문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왜곡을 바로잡아주신다. 로마의 압제에 있던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그들을 해방하고 다윗의 나라를 재현하리라 기대했다. 예수님은 시편 110:1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임을 강조하신다. 그분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열방의 주도 되시며 혈통적인 지상의 다윗 왕국이 아니라, 온 세상을 포괄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임을 일깨우신 것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내게 필요한 예수님을 신봉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서기관들의 위선과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존재와 경건을 과시하려고 긴 옷을 입고 다녔고, 어디서든 상석에 앉아 대접받기를 좋아했다. 연약한 과부의 가산을 착취하면서 긴 기도를 통해 자신의 실상은 감췄다. 그러나 그럴듯한 경건의 모양으로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엄정한 판결은 피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도와 묵상마저 자신을 감추고 남을 속이는 위선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다가 점점 외식과 위선의 함정에 빠지고 있지 않은지, 또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나눔과 섬김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들이었다. 성전 권력자들이기도 하다. 가장 하나님을 잘 소개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도, 하나님 나라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출세다. 인정받음과 물질이다. 권력이다. 이를 위해 거짓 경건으로 치장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들의 평가에 기대어 산다. 외모를 꾸미고 내면을 감춘다. 이런 삶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런 삶이 꽤 주위에 흔하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곤궁한 형편에서도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헌신은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던 서기관들의 탐욕과 대비되며, 그것은 풍족한 중에 넣은 부자들의 헌금보다 더 귀했다. 주님은 서기관의 외식적인 기도는 거절하셨지만, 과부의 진심 어린 헌물은 받으셨다. “크고 많음”보다 “진실과 진심”을 기뻐하신다. 주님은 많이 바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전부 바치기를 원하신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며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찾으신다. 결국 나 자신을 드리는 사람의 것을 받으신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주님을 이용하여 성공하려는 이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값진 헌신이다.
 
 
*서기관과 과부의 모습을 놓고 나를 반추해 보았다. 나는 서기관에 가까울까? 과부에 가까울까? 아쉽고 아쉽게도 나는 사람의 이목을 많이 의식했었다. 지금도 그런 것이 없다면 정직하지 못한 고백이겠지? 분명히 있다. 그래서 씁쓸하다. 체면, 자존심이 얼마든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헌금을 드리는 것이나, 봉사를 하는 것이나…. 어느 것 하나 사회적인 체면과 신앙의 양심이 일치하며 살고 있다고, 당당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오늘 말씀이 나의 마음을 반추하고 중심을 다시 도전하여 되도록 “일치”하며 살아내기를 결심해 본다. 사람들을 향한 이목보다, 주님 앞에 진실함이 사람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살아내기를 결심하고 또 결심해 본다. -특히나 목사라는 직분을 몸에 걸치는 내가 서기관처럼 행동하기 너무나 용이할테니… 나의 결심과 보이는 삶이 일치하도록 살아내는 것은 곧 나 자신에게 더욱 다그칠 수밖에 없으리라….
 
*요즘은 유명한 목사님들이 참 많다. 그래서인지 목사들 삶의 부정적인 면이 상당한 부분 노출이 되는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참되고 바른 목사를 만나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비극이다. 그러므로 의심과 비판, 정죄와 판단의 눈초리만 갖지 말고 과부와 같은 마음도 함께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진심을 드리는 마음…. 과부를 통해 배우는 것이라면, 신앙이 자신의 전부를 드릴 줄 아는 것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부를 드리라 하면 일방적으로 “재물”만 생각한다. 아니다. 과부가 드린 것은 마음이다. 사람들의 이목보다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마음에 반응하여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의 전부를 드렸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런데 과부가 날마다 이렇게 드렸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삶의 어떤 때 이런 모습으로 기어코 나아가고 싶은 그때였을 것이다. 그 순간 과부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은혜에 반응하여 비록 비참한 자기 삶의 가진 것이라고는 두 렙돈 밖에 없었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귀하고 소중하여 진심으로 아까워하지 않고 그것을 드렸을 것이다.
 
*인생에서 이런 순간은 특별하게 일어난다. 특별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공감하고 절감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기회라는 거다. 바로 그때, 늘 비판과 정죄, 판단만 하는 신앙은 이에 반응하는 것도 판단에 그친다. 그래서 자신의 알량한 지식, 경험으로 은혜에 대한 반응을 축소 시켜 버린다. 사람들의 이목도 신경 쓰는 것도 자연스럽다. 말씀이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깊고 깊은 반응들이 나올 때 삶에서도 “의외의 행동”, 가진 것 전부 드리는 희한한 행동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시라.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전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아무쪼록, 비판과 정죄, 판단에 익숙해져 있다면, 과부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복음에 순전하고 진심으로 반응하는 모습도 있는지 반추해 보아야 한다. 만약 복음의 은혜에 반응하고 헌신하는 모습에 너무나 인색하면서 비판과 정죄, 판단에 익숙하다면, 서기관과 다를 바 없다. “더 엄중한 심판”은 피할 수 없다. 살리시기 위해 직면하도록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라.
 
*과부처럼 반응하면 산다. 서기관처럼 반응하면 “더 엄중한 심판”이 기다릴 뿐이다. 나, 오늘 과부처럼 마음을 다해 진실하게 주님과 동행하리라! 과부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에 반응하며 살아야지.
 
 
 
*주님, 서기관들의 외식보다, 과부의 전부를 드림과 진실함과 전심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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