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망연자실… 오늘날의 나답과 아비후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레 10:1-11]
 – 2022년 03월 15일
– 2022년 03월 15일 –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의 제사장 위임식을 마친 후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피워서 주님께로 가져 갔다. 그러나 그 불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과는 다른 금지된 불이다.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고 말았다(새번역_1-2절).”

아연실색 (啞然失色)하고 망연자실 (茫然自失)한 모세와 아론의 모습을 바라 보자니 깊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베어 나온다. 도대체 어쩌다가….


먼저 모세는 이 상황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한다.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나의 거룩함을 보이겠고, 모든 백성에게 나의 위엄을 나타내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새번역_3절).”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를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았을 때 직면해야 할 것이 이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시신을 처리하도록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들(미사엘과 엘사반)에게 당부했다(4-5절). 또 깊은 당혹감에 빠져 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당신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당신들마저 죽을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가 모든 회중에게까지 미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만 당신들의 동족 곧 온 이스라엘 집안만이, 주님의 진노로 타 죽은 이들을 생각하며 애도할 것입니다(새번역_6절).” 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회막 문을 나가면 당신들도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7절) 그리고 다시 한번 성막(회막) 안에 들어와서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규례들을 반복하여 알려 준다(8-11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사랑하는 자식, 함께 하던 형제들이 죽었다. 그것도 하나님께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다 하나님의 불에 타 죽은 것이다. 더구나 이 죽음에 대하여 어떤 슬픔의 애도도 하지 말라 하신다. 성막도 나가지 말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이었다. 위임 받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불을 드렸단 말인가? 또 정해진 “향로”가 아닌 각각 “자기 향로”를 사용했다. “이 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주는 특권(?)을 스스로 인식하여, 더욱 조심해야 하는 마음이 헤이해 져서 이리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성경은 이들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는 분명한 힌트를 준다.



*”너의 아들들이 너와 함께 회막으로 들어올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라. 어기면 죽는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할 규례이다(새번역_9절).” 그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고 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고, 술에 취해 제사의 일을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닐까 싶다.

*성경은 이 사건을 민수기 3장 4절, 26장 61절, 그리고 역대상 24장 1절에서 반복하여 다룸으로 다시는 이런 경거망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조 했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은(너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여야 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하여야 한다. 또 모세를 시켜 말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다(10-11절).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소홀히 여겼다면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 처리 과정에서 이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버렸다.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하나님께 잃은 아론은 죽음의 슬픔과 애도 보다 하나님의 규례대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애잔하기 그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제사장의 삶이 직면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랬을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내어버렸을 때 그랬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고통과 슬픔 조차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잠시 미뤄 두어야 했고, 자신들의 애통을 이스라엘 민족들이 대신 아파하며 우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그것은 죄의 삯이 주는 처절한 고통의 소리들 이었다.



나는?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대로, 규례대로” 드린 제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하나님의 권능의 불이 제물들을 사르는 놀라운 경험을 한 직후….나답과 아비후가 어처구니 없게 하나님의 불에 타 죽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제사장은 9절의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에는 단서다 붙는다. “여호와의 회막에 들어올 때에는”이다. 즉, 일상에서 포도주나 독주는 자연스러운 마실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제사장의 위임식을 드릴 때 마지막으로 드렸던 제사는 화목제였다. 즉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제사를 받아 주신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함께 벌인 잔치였다. 예수님께서도 혼인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다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일상적인 음료였다.

-그런데 문제는 위임식 이후 매일 상번제를 드리며 번제단의 꺼뜨리지 않은 불을 담아 향단에 올려야 했던 규례를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시내산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니라 성막에 임재하셨다는 경외함이 없는 것에서 나오는 “가벼이 여기는 태도” 였다. “이 정도 쯤이야….” 일 수 있는 교만한 마음이다.

-온 백성이 즐거움의 잔치를 마무리하고 이튿날 접하게 된 충격적인 사망 소식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거룩하심을 가벼이 여긴” 충격적인 결과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등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만 거룩함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제사장이니 괜찮아! 라는 마음이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마음 이었다면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투영해야 할 자리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철저히 순종해야 했다. 그 방법은 오직 “명령하신 대로” 순종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하여 그만 자신들이 입고 있는 제사장의 옷에 “적당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마음과 자세”를 감추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제사장은 “철저하게 명령하신 대로” 거룩의 규례를 순종 해야 한다.


*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단호함을 목격한 아론은 그야말로 망연자실 했다. 모세는 죽은 두 사촌들의 안타까움 보다 살아있는 아론과 두 아들들이 저들과 같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서둘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3절은 그런 모세의 말을 들은 아론의 모습을 “잠잠하니(다맘)”로 표현 하였다. 이 단어는 “침묵을 지킨다”라는 의미와 함께 “조용히 침묵하며 하나님을 묵상한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편 4편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 되었는데, 시인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이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묵상한다고 고백한다(시편 4:4).

*아론은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두 아들의 참담한 죽음 이면의 하나님을 바라 보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기쁨과 즐거움 축제의 현장에도 함께 하시지만, 깊은 고뇌와 고통,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함께 계신다. 고통이 저미어 갈 수록 하나님을 깊이 묵상 하며 슬픔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소망하는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지금이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시간이어야 한다. 왜 그러셨을까?를 반복하여 자문자답하며 혼란스러운 상태에 더욱 깊이 함몰 되는 것 보다. “잠잠히” 지금 동일하게 이 고통의 시간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 해야 한다. 그래야 슬픔 너머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회막 문 밖으로 뛰쳐 나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산다.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이 회막에 들어갈 때의 규례를 강조하신다.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라(9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포두주와 독주를 일상에서 허락하셨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때에는 이를 철저하게 절제하고 나아가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곧 세상의 즐거움이나 쾌락에서 깨어 있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과 온전하게 주님께 헌신하는 것에 영향 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구분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명령하신 대로” 온전하게 순종하여 나아가야 할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결국 느슨한 마음에서 오는 온전치 못한 순종이 죽음을 불러 왔음을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 주님의 뜻에 따라 온전하게 순종하는 길이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성령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명령하신 대로 순종 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교훈 삼습니다. 오늘날의 나답과 아비후가 되지 않도록 더욱 깨어 있겠습니다. 거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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