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영광의 하나님이 이끄신 구원의 길 [행 7:1-16]
 – 2024년 05월 13일
– 2024년 05월 13일 –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가장 긴 설교이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된 스데반은 그를 고발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답변할 기회를 얻는다. 스데반은 답변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애굽으로 팔려 갔다가 온 가족을 구원한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고발하는 내용에 대한 스데반의 답변은 세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표면적으로 거짓 증언을 동원해 자신을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 자기변호를 했다. 둘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불순종했으며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시는 줄로 착각했음을 밝혔다. 셋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에게 나아가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대제사장의 질문(1절)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의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발당한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이에 스데반이 답변할 기회를 얻는다. 스데반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긴 연설을 시작한다.
 
 
 
2.스데반의 답변_아브라함, 요셉 이야기(2~16절)
누가는 스데반의 연설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그의 연설의 목적은 무엇인가? 왜 구약 역사를 길게 나열하는가? 그의 연설은 일차적으로 거짓 증언들(행 6:11, 13~14)에 대한 자기변호가 맞지만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얽혀 있다. 곧 “율법과 성전”이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이 율법을 거슬러 말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작 유대인들이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했으며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불순종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부터 옮겨 다니는 성막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지만 성전 자체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졌고(행 7:39~43) 하나님은 성전에만 거하시는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행 7:44~50).
 
 
2~7절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먼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스데반이 이렇게 밝힌 이유가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과 성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염두한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더욱이 성전에서만 계시는 분도 아니다. 또한 ‘영광의 하나님’을 언급한 것도 하나님은 손으로만 지은 성전에만 거하지 않는다는 초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이렇게 스데반이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시내산 율법 수여 이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미 언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곳이 현재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도 아니며, 거룩한 성전도 아니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스데반은 이미 당시 유대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성전에서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의 깨우침은 이토록 예리하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우르를 떠나 먼저 하란에 정착했고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데반은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최종 목적지로 보낸 지역을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땅”이라고 부른다. “너희들”은 스데반의 연설을 듣고 있는 공회원을 포함하여 지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지금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부각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은 아직 약속의 땅에 불과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신명기 2:5에서 비롯된 말씀인데, 아브라함은 일평생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생전 아브라함에게 실제적으로 땅을 주신 적이 없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자기가 의존하고 기댈 만한 것,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만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실제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 타국(다른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종살이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길” 것을 약속하셨다(참고_출 3:12).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그대로 성취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과거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셨음을 뜻한다.
 
 
8절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요셉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증표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창 17:11).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에 대한 외형적인 표증이다.
 
 
9절부터 16절까지는 요셉의 이야기다. 스데반 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요셉의 이야기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해석하기가 난해하다. 먼저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의 가족의 수가 “일흔다섯 명”이라고 언급하는데, 창 46:27과 출 1:5에 기록된 ‘칠십 명’과 차이가 있다. 이는 스데반이 히브리어 구약성경 보다는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에 기록된 “칠십오 명”에 근거하여 설명하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은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요셉의 아홉 명의 아들 중 나머지 일곱 명을 추가한 것으로만 추측한 것이다.
 
또, 누가는 요셉이 세겜 땅에 장사된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유대인의 정서에는 요셉이 묻힌 땅 세겜은 현재의 사마리아 땅이기 때문이다. 청중이 정통 유대인들이기에 증오의 대상인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맥락을 잇는다면, 유대인의 땅만이 조상들이 장사될 만큼 특별한 장소가 아님을 말하려는 것일 수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또, 약속의 땅에 관한 유대인들의 편협하고 완고한 지리적 개념을 넌지시 겨냥한 것은 아닐까?
 
 
 
나는?
-자기변호 대신에 복음변호를 하는 스데반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거짓 고소를 듣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에 복음을 변호하는 기회로 삼는다. 성령과 지혜의 사람 스데반은 성령이 예비하신 말을 따라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셨고, 그에 반해 이스라엘은 얼마나 일관되게 하나님께 불순종했는지를 설명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변명과 자기변호에 익숙하다. 특히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는 지극히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이러한 순간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변호하는데 그의 위기를 사용하셨다. 나도 역시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늘 말씀에 젖어 있고 성령에 충만한 삶을 추구하리라.
 
-스데반의 연설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과 신실하지 않는 유대인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방 땅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나타나 소명을 주셨다. 하란에 머물러버린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고, 또 할례 언약을 통해 자손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이삭과 야곱과 열두 아들을 차례로 주셨다. 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역사를 꾸려 오신 것이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데 이스라엘이 거역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토록 신실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자기 하나님에게 신실하지 못했다.
 
-조상들의 탐욕과 시기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언약의 역사를 성취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이 시기하여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겼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그를 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셨다. 그래서 요셉을 통해 야곱의 칠십오 명의 가족들이 기근을 피해 안전하게 애굽 땅에 정착할 수 있게 하셨다. 그곳에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예수도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그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 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손들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그들이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1~7절).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구속사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는 발붙일 만한 땅 하나 없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뿐이었다. 게다가 그 약속을 받는 길도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해야만 하는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영광의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그 모든 어려움들을 넘어 반드시 약속을 성취해 가실 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반드시 성취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구하고 신뢰한다면 그 약속과 함께 주시는 고난의 열매에도 기꺼이 감사해야 하리라.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8절). 아브라함에게 단지 하나님의 약속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는 협력자로 대우하신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할례를 행함으로서 언약의 파트너로서 마땅한 신분과 의무를 지켜야 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조상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가신다. 스데반은 여러 형제의 시기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 팔렸지만 하나님이 요셉을 구출하셔서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음을 증거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지금 스데반 자신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고난 받는 종들과 함께 하셔서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스데반은 이처럼 자신의 유죄 혐의에 대해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탁월하게 복음을 확증하고 있다. 나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에 마땅히 전할 말이 준비된 “주의 말씀에 능통함”을 구비해야 하겠다.
 
 
 
*주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오늘 나에게도 구원이 임하게 하신 줄 다시 확인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주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언제, 어디서든 증거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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