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동체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구제로 인해 내부 문제가 일어난다. 지체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도들은 일곱 일꾼을 뽑아 그들에게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일곱 일꾼 중의 스데반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대항하는 자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된다.
사도행전 1~5장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역경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면,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내부적으로 일어난 문제를 다룬다. 또한 6장부터 9장까지는 초대교회의 사역이 지리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리적 확장은 스데반의 열정적인 설교와 순교로부터 시작된다.
1.일곱 일꾼을 선출하다(1~7절)
지금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외부적인 박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본 단락은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내부적인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의 발단은 공동체의 신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 ‘히브리파 유대인(본래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대부분 지중해 중심으로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에 새롭게 정착한 유대인)’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는 자신의 생을 고향에서 마감하려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과부들이 많았다.
1절의 “매일의 구제”는 이미 사도행전 4:35에서 언급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는” 것을 가리킨다.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남에 따라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과부들을 돕는 사역 분량도 급격하게 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책을 2~4절을 통해 제시한다. 2절을 직역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자선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사도들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돕는 일이 말씀 전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전념해야 할 것은 기도와 말씀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기도와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말씀 사역(디아코니아 투로구)”은 직역하면 “말씀 섬김”이다. 특히 1절의 “매일의 구제”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말씀과 구제는 모두 성도를 섬기는 일인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사역 분담의 문제였다. 사역의 중요성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구제 사역을 맡을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은 선명하게 제시했다. 그 조건은 열두 사도의 조건(행 1:21~22)과 달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3절)”이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었기에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사람을 일꾼으로 쓰기를 원했다.
그런데 누가는 왜 일곱 명인지에 대한 것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구약의 경우를 따랐거나(수 6:4; 렘 52:25; 에 1:14), 중요한 안건을 투표로 결정해야 할 때 홀수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본문의 사건을 교회 집사직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이 성도를 “섬긴다(디아코네오)”라는 것일 뿐, 누가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집사(deacon)”로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일곱 일꾼을 뽑는 일에 관하여는 열두 사도가 제안을 했지만, 실제적으로 선출한 것은 교회 성도들이 직접 했다(5~6절). 일곱 명의 이름이 모두 헬라어 이름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예루살렘 본토 출신보다는 디아스포라 출신이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름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이다. 스데반과 빌립이 가장 먼저 언급된 이유는 곧이어 그들의 행적이 소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을 기도하고 안수하여 일꾼으로 세웠다.
사도들은 일곱 일꾼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도록 구하였다. 이들이 세워짐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새번역_7절).” 였다. 하나님의 일꾼, 좋은 일꾼을 세우면 공동체가 더욱 견고하게 서 나간다. 예루살렘 교회에 세워진 일곱 집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져 가고 제자의 수도 더 많아지며 많은 제사장들도 예수를 믿게 되는 일에 힘껏 힘을 모았다.
2.스데반이 잡히다(8~15절)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일꾼 중 하나인 스데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누가는 그들이 어떻게 일하였는지에 대한 것보다 그들 중 스데반과 빌립의 전도 이야기를 기록했다. 누가는 스데반의 사역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8절).”고 소개한다. 이를 보면 누가의 관심은 그가 행한 기적보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써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당하여 붙잡힌 사건에 더 초점을 두었다.
스데반이 9절에서 복음을 전하며 신학적인 논쟁을 벌인 이들이 “자유민들(회당에 출석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유민들은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한다, 고발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의 말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 레위기 24:11~16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는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둘째,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 셋째,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관습을 뜯어 고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11~14절). 누가는 자유민들이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13절)”라는 표현을 통해 고발 내용들이 모두 거짓임을 밝힌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서서 재판을 받고 순교를 당하는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의 절정에 해당한다.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경고와 함께 풀려났고, 5장에서는 사도들이 채찍질을 맞고 석방 되었다. 그리고 스데반의 이야기는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 또한 누가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지혜와 도움을 구하면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록했었다(눅 12:12; 21:15). 그 약속대로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0절)” 라는 증언을 통해 스데반을 비롯한 제자들의 삶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이기지 못한 “자유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 앞으로 끌고 간 것이다. 여기에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위증하게 한다. 14절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는 직역하면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관습”이다. 이 관습은 서기관들이 율법을 해석한 구전전승을 가리키는 것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 수전 전승과 율법 자체를 모두 모세의 율법에 속한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구전의 내용을 어기거나 비판하는 것도 율법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들이 내건 죄목은 크게 두 가지이다.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한 모독이다. 7장의 스데반 설교 역시 이들의 고발 내용과 연관 되어있다. 누가는 스데반의 자기 변호에 앞서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모습을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묘사한다(15절). 그가 얼마나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 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행하여지는 구제에 의존하던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되는 일이 벌어져 교회 안에 불평이 커져갔다. 이에 사도들은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자신들의 우선순위 설정 잘못으로 돌린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통해 소통과 공감능력을 키워가는 교회이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는 결코 문제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겸손하게 문제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풀어 나갈지 함께 고민하는 공동체가 오히려 성령 충만한 공동체이리라. 문제에 직면할 때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공동체 문제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먼저 찾는다.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 했다면 공동체 안에 더욱 말씀의 역사가 풍성히 나타나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사역에 최우선을 두지 않고 다른 일들에 힘을 분산할 때, 그 공동체는 곧 영적인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다른 어떤 일보다 말씀과 기도를 제쳐놓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구제 사역을 맡아줄 사람들을 뽑아달라고 부탁한다(3절). 사도들이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업무를 잘 나눠주는 것 역시 성령 충만한 행동인 것이다. 나도 성령 안에서 나에게 붙여주신 교역자들에게 지혜롭게 맡기고 내가 집중해야 할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리라.
-사도들의 요청에 따라 공동체가 선출한 일꾼들은 모두 성령 충만한 자들이었고, 헬라파 유대인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다(5~6절).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는 과부들을 도울 뿐 아니라 장차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헬라어권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공동체 안의 어려운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을 더욱 힘 있게 하셔서 말씀의 성장을 이루게 하신다.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먼저 행할 때, 하나님은 복된 성장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스데반이 교회에서 맡은 직임은 과부들을 지원하는 사역이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직무인 복음을 전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다른 일을 한다는 핑계로 복음 전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전도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말과 글에 힘이 없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든지 성령으로 구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스데반의 말에 굴복할 수 없었던 이들은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체포하고 공회에 넘긴다. 자신들의 생각과 편견에 매여 스데반이 전하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과 매수에 걸린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거짓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증언을 듣고 있는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자신을 붙잡아 온 사람들에게도 매이지 않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자신을 고소하는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도 매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붙잡힌 모습이다. 나의 얼굴은 무엇에 붙잡혀있을까? 성령이 충만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평안이 그대로 드러난 스데반의 얼굴이 진심으로 부럽다.
*주님, 억울한 일을 당해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이어가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먼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늘 충실하겠습니다.
*주님, 성령 충만한 삶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담담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것임을 봅니다. 저도 일상에서 육체적인 마음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반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