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죽음, 교회의 위기, 위험하지만 전도의 기회! [행 7:54-8:8]
 – 2024년 05월 16일
– 2024년 05월 16일 –
스데반으로부터 마지막 책망의 말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청중은 격분한 나머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간다. 한편 스데반은 이런 와중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바라본다. 격분한 청중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그를 돌로 쳐 죽인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영혼을 예수께 맡긴다는 기도와 함께 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간구를 드리며 숨을 거둔다. 그 자리에 신성모독자의 정당한 죽음에 대한 증인으로 사울이 참여한다.
    
    
    
1.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54~56절)
사도행전 7:2에서 시작된 스데반의 연설은 53절에서 중단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결론에 대한 궁금함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설의 논점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공회원들의 분노는 쌓여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 예수를 죽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순종하라고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장본인이 자신들이라는 스데반의 책망은 그들의 분노를 참지 못하게 했다.
    
‘누가’는 스데반의 연설을 듣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마음에 격분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라고 표현했다(54절). 개역 개정은 “마음에 찔려”라고 번역함으로 마치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 표현은 그들의 격분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회개의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마음에 분이 가득 찬 것이다. ‘이를 간다’라는 표현도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또 다른 은유적 표현이다.   
    
공회원들의 이런 격분한 반응과 달리 스데반은 대조적으로 침착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행 6:5). 그런데도 그는 또다시 새롭게 성령 충만함을 받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55절). ‘누가’는 그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았고, 이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라고 말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신약에서 예수를 “인자”로 묘사하는 경우는 사복음서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칭호는 예수께서 친히 즐겨 사용하신 것이고, 특히 지금 스데반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의 심문을 받으며 매우 의미심장하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그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한 바 있다. 즉, 스데반은 같은 장소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이 진실이었음을 증언함과 동시에 그도 역시 같은 말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스데반은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55절).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견해가 있으나 누가복음 12:8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주로 시인하고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한 스데반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순교하는 마지막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2. 스데반의 순교(57~60절)
청중들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의 귀를 막았으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은 스데반이 거짓말을 하였고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스데반은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사형을 당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행간에 드러나는 뉘앙스는 스데반의 죽음이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거친 사형 선고가 아니라 참석자들의 분노에 의한 우발적인 살해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스데반은 ‘폭도’들에게 붙잡혀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 문헌 미쉬나에는 돌로 쳐 사형에 처하는 형벌에 관한 공식 절차를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이 절차를 따라 스데반의 사형이 집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신성 모독죄로 사형이 확정된 자는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가 묻힐 땅을 자신이 판다. 깊이는 약 2~3m이다. 그리고 사형당할 자의 겉옷을 벗기고, 증인들도 겉옷을 벗는다. 이 과정은 산헤드린 공회원 1명이 반드시 참석하여 집행한다. 죄인이 벗은 겉옷과 증인의 옷을 이 집행을 맡은 재판관 앞에 놓고 집행한다. 그리고 증인은 맷돌 크기의 돌을 죄인에게 던져 구덩이에 떨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형 집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을 던져 그대로 무덤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해야 사형 집행에 동참한 이들이 부정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참고로 증인들이 옷을 벗는 것은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임을 밝히는 행위였다.
    
사울이 이 부분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상해할 것은 없다. 스데반을 향해 대항하던 길리기아 회당 소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행 6:9). 그러나 사울은 돌로 치는 데 동참하지는 않았다. 스데반은 청중이 던지는 돌을 맞으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기도를 드렸다(59절).
    
    
    
3. 교회의 박해와 흩어짐,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8:1~8절)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8장 초반부는 9장에서 사울의 회심을 다루기 전에 그가 얼마나 초대교회를 비참하게 박해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박해자들의 손을 피해 피신한다(1절). 경건한 성도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고(2절), 사울은 교회를 잔멸(뤼마이노마이_해치다 파괴하다) 하기 위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3절).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곳에서도 복음을 전한다. 4~8절은 일곱 일꾼 중의 하나인 빌립이 사마리아로 피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다.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질 정도로 고통과 고난이 심해졌지만,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광범위하게 전해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곧 비유대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데 박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누가’는 그 심한 박해로 인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이 빌립은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빌립이 아니다. 6장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출된 일곱 일꾼 중의 한 사람이다. 빌립이 사마리아의 어느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되짚어 봐야 할 것은 공관복음 저자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한 이야기를 다루었다(눅 9:52; 10:30~37; 17:11~19). 이는 예수가 직접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요한복음과 맥을 같이 한다(요 4:4~42). 이러한 기록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신학을 부각한다.
    
1세기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남아 있었다. 직접적인 분열의 시작은 포로 귀환 이후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신구약 중간기 하스몬 왕조 힐카누스 1세(주전 134~104년)의 사마리아 정벌 때 그리심산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주전 63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사마리아는 유대의 지배를 벗어나지만, 갈등의 골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갈등상태인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한 빌립의 담대함이 매우 놀랍다. 복음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에게도 “타헵” 혹은 “회복자”로 알려진 장차 올 구원자를 늘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그들도 신명기 18:15~19에서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다.
    
빌립은 모세가 말한 이 선지자가 이미 오셨고,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했을 것이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많은 기적을 행하게 하셨다. 이로써 빌립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인 것을 사마리아인들 앞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중풍 병자들이 일어나고, 못 걷던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을 목격하며 그 성에 큰 기쁨이 일어났다(5~8절)
    
    
    
나는?
-종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 그러면 메시아를 죽인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이를 갈면서 더욱 증오와 적의를 키운다(54절).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다는 말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승인하였으며(58절), 교회를 잔멸(파괴)하는데(8:3절) 앞장섰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스데반을 죽이는 죽음의 증인이요 참여자였던 사울은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스데반의 기도로 복음의 증인이요 참여자로 변할 것이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울은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스데반은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55절). 예수께서 하늘 법정의 증인으로 나서서 스데반을 변호하고 계시는 것을 본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승리의 부활로 바꾸셨던 하나님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다.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순교 중에도 복음이 전진하고, 우리는 넘어져도 하나님의 나라는 굳건하게 세워져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옹호하시고 변호하시는 예수님과 순종의 고난을 승리의 지렛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복음을 전하고 고백하며 살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변증하고 예수님은 스데반을 변호하여 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변증하고, 예수님도 우리를 변호하여 주심을 한순간도 잊지 않아야 하리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인자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56절). 성령이 공회 앞에서 선 위기에서 극적으로 건져주지 않으셨으나 그 성령 때문에 스데반은 말해야 할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었고,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으며, 예수님처럼(눅 24:34, 46)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무릎 꿇리는 위세가 아니다. 내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사랑으로 잔인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복된 소식과 사랑을 선포하면” 임하는 성령의 나라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에게 하늘 문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환영하여 주신다.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처형된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스데반 역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인 것을 확증해 주시는 모습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돌로 치는 순간에도 너는 의인이라고 말씀하시며 응원하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신다. 우리 공동체와 함께하신다. 어렵고 힘든 순간일수록 더욱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정확히 증언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종교 지도자들과 청중들은 마음이 찔렸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회개한 사람들(2:37, 41)과 달리 이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증언이 더욱 빛을 발하자 오히려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다. 단순히 스데반의 말을 듣기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귀를 틀어막고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이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려 있음을 보게 된다.
    
*말씀을 들을 때 강한 찔림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반드시 돌이켜 회개하는 행동이 따라야 할 것이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처럼 기도했다. 나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차별과 반목과 질병에 사로잡힌 땅, 소외와 외면의 땅, 소망 없는 버려진 땅 사마리아가 생명과 기쁨이 약동하는 땅이 된 것은 박해를 피해 흩어진 복음의 증인들을 통해서였다.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난 자들을 통해 유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한 땅이 살아난 것이다. 스데반을 죽인 사탄의 역사를 통해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땅을 그리스도의 땅으로 살려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령의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빌립을 통해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본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니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찾아왔다. 빌립의 사역에서 예수가 생전에 보이신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 것은 부활하여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의 사역을 통해 반역과 소외의 땅 사마리아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큰 기쁨이 있다. 복음 때문에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교회에 임한 큰 박해를 피해 흩어진 신자들은 단지 어려움에서 몸을 피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삶에 닥친 위기가 오히려 복음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빌립의 전도는 말로 가르치는 사역과 표적을 보여주는 행동이 함께 있었다. 그 결과 복음의 많은 열매가 나타났다. 우리가 전하는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삶의 행동들은 무엇일까? 고민이 되는 아침이다.
    
    
    
*주님,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저도 이 세상을 마무리할 때 어떤 상황에서든지 성령충만한 죽음을 소망해 봅니다.
*주님, 한국교회가 위기의 때를 지납니다. 그런데 오히려 위기의 때가 위험하나 기회가 되었음을 깨달아 소망이 생깁니다. 지금 위기의 때일수록 더욱 복음을 전하는 교회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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