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께서 정말 좋게 보아 주시리라고 생각합니까? [레 10:12-20]
 – 2022년 03월 16일
– 2022년 03월 16일 –

모세는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이후에도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계속 전한다. 비극적인 죽음이 일어났지만,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는 계속 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론의 남은 두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다시 제사장 음식 규정을 위반하고 말았다.

나답과 아비후가 위임식 직후 여호와의 불에 죽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것 보다 하나님께 헌신된 아론과 남은 두 아들은 계속 하나님께 제사를 집례 해야 했다. 무엇보다 더욱 엄격하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정을 지키려고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제사장의 음식 먹는 규정”을 위배하고 말았다.

12-13절은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가 집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한 속죄제를 드리고 제사장의 소득으로 남은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고 명령 하셨다. 모세는 비록 나답과 아비후가 즉었지만 남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남은 규례대로 이를 온전하게 처리 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그 고기를 “이미 불사르고(16절)” 말았다. 가르쳐주신 규정대로 남은 고기를 제사장들이 회막 안에서 먹으라는 명령에 순종 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모세는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순종 하지 않음으로 죽은 직후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 졌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 하지 않은 것 이었지만, 아론의 설명을 듣고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고의적으로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19절이다.

“이 말을 듣고, 아론이 모세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오늘 내 아들들이 속죄를 받으려고 주님 앞에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한 일이 오늘 나에게 닥쳤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염치로, 오늘 그들이 바친 속죄제물을 먹는단 말이오? 내가, 그들이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으면, 주님께서 정말 좋게 보아 주시리라고 생각합니까?(새번역)”

*아론은 엘르아살과 아다말이 방금 자신들의 형제들을 잃었던 일을 돌아보면서 죄 많은 자신들이 감히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하게(12, 17절)” 구별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죄인으로서(방금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것을 깊이 공감 하면서) 어떻게 죄인의 죄를 속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아… 나도 공감이 된다….

*아론과 엘르아살, 이다말이 비록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이 되었으나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들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죄인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고백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를 인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을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그들 역시 죄인이고,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행동으로 갈급 하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어린 양 되셔서 단번에 죄를 사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다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새번역_히 7:27).” 주님께서는 매일 자신들의 죄를 먼저 속죄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던 아론과 그 아들들과 달리 단번에 자기를 바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다.

*그렇기에 그 완전한 주님의 구원 하심을 기억하여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고 누려야 할 것이다.


나는?
-오경의 율법과 레위기의 제사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 아니다. 민수기 27장과 36장의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에서 보듯 하나님의 율법은 상당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유연성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하였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나를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새번역_사 66:2).”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려다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 앞에 선 아론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행동을 받아 주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론의 네 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불에 삼켜져 죽었지만,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멀쩡했다. 이 차이는 “교만과 겸손”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해 제사를 건성으로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 했지만,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하나님의 공의로움 앞에 제사장이었지만 자신들도 역시 나답과 아비후와 다를 바 없는 죄인 이기에 도저히 “지극히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음을 고백 하였기에 살았다. 또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직후 그 슬픔과 고통에 형식적으로라도 그 고기를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애통함을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시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은 제사의 엄숙성을 뼈져리게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형식의 엄격함과 내용의 순수성은 제사 제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형식과 내용이 이처럼 준수 되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형식은 유지 되는데 내용이 현격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선지자들의 외침중에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사 1:11, 13, 렘 6:20, 암 5:21)는 하나님의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소굴(마 21:23)”이라 하셨으니 말 다했다. 건강한 교회는 형식과 내용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의 모습이 살아있어야 한다.

-제사장으로서 공적 임무를 맡은 아론과 남은 두 아들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아들이고 형제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제사장의 숙명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공적인 의무를 잘 이해 하면서도 아비로서의 깊은 슬픔과 죽은 아들들에 대한 측은함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모세가 제사장으로서 먹어야 할 음식 규정을 왜 지키지 않느냐는 다그침에 “이 참혹한 일 앞에서… 내가 무슨 염치로… 속죄제물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좋게 받아 주시겠는가?(19절)” 토로한다. 하나님도 아론의 마음을 공감해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의 하나님이시다. 규례의 형식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답가 아비후의 죽음을 보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 슬프고 애통하는 마음, 그들이나 우리나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더욱 뼈져리게 인정하기에 감히 속죄제물을 먹을 수 없었다는 아론의 말을 “좋게 여기신(20절) 것이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정직한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슬픔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 마음을 보듬어 주신다.


*주님, 역시 정직한 마음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형식을 철저히 지키는 것과 함께 솔직하고 겸손한 마음 늘 유지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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