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치유받은 맹인과 바리새인들 [요 9:13-23]
 – 2022년 02월 01일
– 2022년 02월 01일 –
또 안식일에 날 때부터 맹인이 치유를 받았다. 무리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간다. 바리새인들은 더욱 더 주님을 율법을 범한 자로 내몬다. 동시에 주님인식일에 행한 죄를 증언 받기 위해 치유받은 맹인을 닥달한다. 축하와 감사,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할 망정…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메시아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을 보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입맛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맹인을 치유하여 주신 사건을 똑바로 보지 않고 주님의 사역이 안식일을 범한 죄로 몰아가려는 바라새인들의 흥분이 안타깝다. 안식일의 정신은 잊어버리고 안식일 법이라는 형식만 매몰차게 지키는 그들이 눈 뜬 소경이었다. 하지만 맹인은 평생을 어두움 속에 살았지만 주님께서 실로암 못에 보내셔서 씻으라고 할 때 순종 했고 앞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여 주신 분이 누구인지(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고백한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막 눈을 뜬 그의 앞에서 주님에 대하여 갑론을박한다. 지금 그들의 눈 앞에 치유받은 맹인 뿐 아니라 38년 된 병자도 갈릴리에서는 왕의 신하의 딸도 고친 것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 이기에 범죄한 것이라며 흥분한다. 급기야 자신들 앞에 있는 ‘맹인’이 날때부터 맹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까지 변질되어, 심지어 맹인의 부모까지 호출하여 확인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으로서의 권위를 맹인 뿐 아니라 부모까지 불러 분명하게 일어난 사실임에도 주님의 치유하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의 권위로 분명하게 일어난 하나님의 치유임에도 오히려 윽박지르고 죄를 범한다.

*맹인의 부모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믿는 자들을 출교 하기로 결의 했기에 두려워하여 아들 맹인이 장성 하였다고 그에게 물어보라고 꽁무니를 뺀다(21-23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메시아의 도래의 표지인 맹인이 고침을 받은 표적의 현장에서 바리새인들은 메시아 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에만 연연한다.

*바리새 운동의 취지는 매우 건강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순수한 운동이 시간이 흘러 매우 정치적인 집단으로 까지 변질되어 버린 참담함을 감출 수 없다. 이제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에 따라 생명을 살리신 주님의 사역도, 파생된 조항 한 두곳만 어겨도 마치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는 것인양 매도하였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저자 직강보다 자신들이 연구하여 규정하여 놓은 율법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규정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판단하고 정죄해 버린다.

*주객이 전도 되었고, 경우가 사라졌다. 진리보다 현상에 더 관심을 쏟는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빠질 수 있는 어이없는 현실이다.

*이 와중에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는가?(16절)”라며 주님께 우호적인 자세를 가진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니고데모와 같은 이들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진리를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작은 희망이 보인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지도자들이 소수라도 존재하기에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나는?
-맹인은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발라준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당연하다. 보이지 않을 때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맹인 됨을 보고 가만히 다가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자신의 눈꺼풀에 붙이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보냈기에 가서 씻는 순종은 자기 자신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혹시 맹인을 옆에서 도와줄 이의 마음도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맹인은 날 때부터 사회로 부터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행하였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다(30-33절).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다(17절)”라고 고백 했고 이어서 결국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 라고 고백 하였다.

-맹인은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알고 깨달아 믿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두 눈이 영적으로 감겨 있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맹인이 세상을 보게 된 사건을 바라보고서도 굳이 눈을 떠서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지독한 자기 중심의 고집이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 것이다.

-지식은 넘칠 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은 철저히 어둠에 잠겨 있다. 육의 눈은 선명하게 떠 있지만, 영의 눈이 굳게 닫혀 있기에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미완성인 율법, 그것도 자신들이 해석하여 첨언한 것들을 들먹이며 주님께서 하늘로 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고 궤변 한다.

-주님이 행하고 있는 있을 보고 있으면 놀랍기 그지 없지만, 굳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그리스도이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의 눈이 닫혀 있어 어둠 속에 있으면 직접 보아도 볼 수 없다. 들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한편 치유받은 맹인의 담대한 모습에 위로를 얻는다. 자신을 치유해 주신 주님을 바리새인들의 여러 회유책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자신도 치유된 후에도 직접 보지 못한 주님을 배신 하지 않는다. 꿋꿋하게 주님의 선지자 되심을 선포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종교 권력으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들을 출교 하기로 공언하고 공표 하였기에 맹인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신 이가 주님이심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을 두려워 한다. 진리에서 떠난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여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백성들을 자신들의 결정으로 억압한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혜의 율법이 억압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당시 안식일 규칙에는 39가지 종류의 금지 규정과 이에 따른 부칙이 무려 678개항이 있었다. 주님의 치유와 관련되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독한 환자만 치료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안약을 눈에 넣는 것 조차 금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안식일에 진흙을 이기고 그것을 눈에 바르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어기는 범죄 행위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무리들은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이와같은 과정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을 알고 함께 감격하고 기쁨을 나누기 보다 오직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율법의 규율에만 관심을 가지고 반강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데려 간 것이다. 이 얼마나 씁쓸한가…. 마치 안식일을 잘 준수하는 서로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 것 처럼 그의 기쁨과 환희를 공감하지 않고 차갑게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다…. 아….

*종교적인 율법 준수가 인간적인 기쁨을 나눌 감성 조차 앗아가 버렸다. 평생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된 감격스러운 한 사람을 차갑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질책하는 사람들 앞에 서게 했다.

*이것을 바라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지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 교훈을 받는다. 기뻐해야 할 것을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도리이다. 안식일의 형식은 사람을 차갑게 만들지만,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을 따뜻하게 만든다.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슬픔도 함께 공감하지 못했던 무리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다.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것이라 자신하며 그토록 조항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지키던 그들이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정신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님, 공감 없이 다그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행한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주님, 종교 권력이 적재적소에 그 권위를 발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헛된 곳에 남용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경우가 사라진 교회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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