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너희로 믿게 하려… [요 11:1-16]
 – 2022년 02월 05일
– 2022년 02월 05일 –
주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을 피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머물고 계셨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투병 소식을 들으셨지만, 어쩐 일인지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며 지체하신다. 이틀 후 주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시려 하자, 제자들은 유대 지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주님은 나사로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 뿐 아니라 제자들이 믿음을 얻게 될 것 이라며 유대 땅 베다니를 향해 나아가신다. 도마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라는 생뚱한 반응이 당황스럽게 이어진다.

여전히 유대 땅은 주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님은 위험을 무릎쓰고 예루살렘에서 겨우 3km 떨어진 베다니로 올라 가신다. 왜 올라 가셨을까?



1.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 머무시다가 유대 땅 베다니로 걸음을 떼신다. 하지만 주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 축측하기로 주님께 소식을 전하러 사람을 보낸 직후 숨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고,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새번역_11절)”고 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에게 “죽을 병이 아니다(4절)”고 말씀 하셨지만, 나사로가 죽을 것을 알고 계셨고, 그를 죽음에서 살리실 계획이셨던 것이다. 특히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개의 표적 중 7번째 표적으로 앞서 소개한 6개의 표적의 완전판이라 할 수 있다. 이 표적을 통해 주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주님의 걸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걸음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이루어진 것이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셨다. 주님은 나사로의 투병 소식을 듣고서도 이틀이나 더 머문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와 주님이 머물고 계신 요단 건너편 베다니는 약 150KM 떨어져 있었다. 소식을 듣자 마자 출발해도 오가는 시간이 족히 2-3일 걸릴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새번역_14-15절).” 라고 말씀하시고 출발 하셨다.

*주님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사셨다. 인간적으로 급박한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때를 따라 움직이셨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순종 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2.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신 것은 그가 죽었음을 의미한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이를 회복되어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완전히 죽었음을 말씀하시고 한 가지 특이한 말씀을 하셨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한다(15절)”는 것이었다.

당연히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해 기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것으로 보아 제자들의 믿음이 굳건해 지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의 표적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향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의 삶에 큰 힘이 될 것을 아시고 기뻐 하신 것이다.

*다시 살림은 죽음을 전제한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마태는 주님의 출생에 대하여 천사 가브리엘의 증언을 빼놓지 않았다.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죽으셔야 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 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죽어서 다시 살아나야 하셨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망(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심판 하신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하였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다시 시작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다. 은혜다.



3.주님의 사랑
나사로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였다(3절). 그들이 사는 곳은 “베다니”였다. 직역하면 히브리어는 ‘빈민의 집’이고 아람어는 ‘고통의 집’이다. 세상에 마을 이름이 ‘빈민의 집’, ‘고통의 집’이라니… 그 마을이 얼마나 소외되고 어려운 지역인지 짐작이 간다.

주님은 그 마을에 사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를 아끼셨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당시 소외된 자들(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이방인)을 먼저 찾으셨고 잃어버린 자들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둠과 고통 가움데 있는 스스로는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긍휼을 베푸셨다. 이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걷는 길이기에 인간적인 아픔에 먼저 반응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에 더 순종하신 것이다. 그 순종이 어둠에 있는 인생들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기에….

*주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 무엇보다 4절은 나사로의 상태를 이야기 하시면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한한 사랑, 그것은 인간적인 욕심, 급박한 상황에 먼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 행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는?
-사람들은 늘 자기 시간에 묶여 산다. 자기가 필요한 것, 급한 것이 먼저다. 당연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응답 받는 시점은 늘 자기 시간이어서 문제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셨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신다.

-주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시고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을 들어 언제든 치려고 벼르는 유대 땅으로 다시 올라 가셨다. 주님의 사랑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일관되다. 십자가의 사랑은 일관된 주님의 사랑이다.

-어일 적에 이 본문을 읽을 때는 왜 주님이 바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셨을까만 생각했었다. 너무도 아쉽고 아쉬웠다. 사역의 시간이 쌓이면서 주님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아무리 나의 바램의 시간이 간절하여도 주님께서 정한 때에 이루어진 역사를 차근 차근 경험해 보니, 꼭 나의 간절한 때가 정답이 아니다. 주님이 이루실 때가 정답이다.


*주님, 나사로 뿐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나에게 죄와 사망을 이긴 부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나의 때가 아니라 주님의 때를 따라 살겠습니다. 믿음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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