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안나스의 집에서… 주님의 당당함 vs 베드로의 연약함 [요 18:12-27]
 – 2022년 04월 12일
– 2022년 04월 12일 –

잡혀주신 주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다.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 문지기 여종의 질문에 주님을 부인 한다. 대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친다(때린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불을 쬐며 바라보다 두 번이나 더 주님과 함께 하는 자임을 부인한다. 곧 닭이 울었다.

주님의 심문 받으시는 모습과 그것을 지켜보며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주님은 대제사장 가문을 이룬 안나스라는 자에게 심문을 받고, 같은 시각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 뜰에서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다.

주님은 안나스에게 당당하게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친 것을 말씀 하시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르친 교훈을 물어보라(19-21절)고 당당하게 대처 하신다. 하지만 베드로는 문지기 여종의 질문과 사람들의 질문에 연거푸 세 번 부인하고 만다.


#1. 안나스 앞에 선 예수님
주님의 요동 하지 않는 당당한 대답에 곁에 서 있던 아랫사람이 ‘감히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손바닥으로 주님을 때렸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증거를 대고,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는가?’ 당당하게 맞서셨다. 당시 최고의 권위자였던 대제사장 앞에서 전혀 위축됨 없이 당당하게 말씀 하셨다. 자신을 친 아랫사람(경비병)에게도 죄 없는 자를 왜 치는가 항의하셨다.

대제사장 안나스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의 가르침(19절)”에 관하여 심문했다. 주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에 반역을 꾀하였고 제자들은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죄목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공개적으로 가르쳤으니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하셨다.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으신다. “끝까지 사랑하시는(13:1)” 주님의 모습이 변함이 없다.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이 한심하다. 율법에서는 살인의 경우 한 사람의 증거 만으로 죽이지 말라고(민 35:30) 했는데, 죄 없는 주님을 붙잡고 무조건 죽일 증거를 겁박 하여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율법의 권위, 종교의 권위로 포장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하시는 주님을 아랫사람 하나가 손바닥으로 쳤다. 율법으로도 불법을 자행하는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한 주님을 폭력으로 억압한 것이다. 이미 율법 보다도 위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세가 한심하고 씁쓸할 뿐이다. 그 기득권층에 기생하여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손바닥을 휘두르는 ‘아랫사람’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2. 모닥불 앞에 선 베드로
아… 베드로는 얼마나 불안한 심정일까? 곁눈질로 안나스 앞에 당당히 맞선 주님의 모습과 불안해 하며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가린 베드로의 모습이 교차된다.

문지 여종의 돌발 질문에 주님을 한 번 부인 했고, 함께 불을 쬐던 사람 중 하나가 “너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지?(25절)”라고 던진 질문에 또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조금 후에 대제사장의 종의 하나, 곧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러시오?(새번역_26절)”라고 재차 묻자 다시 부인하고 만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27절).

날이 추워 따뜻하게 하려고 피워 진 모닥불 앞에 서 있었지만, 마음은 한 없이 추웠을 것이다.



나는?
*안나스는 AD 6년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어 10년 동안 감당했다. 이후 자신이 물러나면서 사위인 가야바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 주어 막후에서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가야바도 자신이 물러난 뒤 다섯 아들에게 돌아가면서 이 직을 수행하게 하여 막강한 종교 가문을 이루었다. 그들에게 주님은 성전 청결과 같은 사건을 통해 종교기득권들의 성전이 되어 버린 것을 질타 하셨다. 성전을 통해 사죄의 은혜를 누려야 하지만 지금 성전에서는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이셨다.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 내시거나, 죽은 이를 살려 주신 일드은 모두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할 속죄의 은혜와 연관 되어 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이 종교기득권자들에게 불편했던 이유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18:12)”며 주님을 죽일 공작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며 겉으로는 율법에 기초한 재판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종교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이 주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섰다. 그들 앞에 선 주님은 그들이 깨닫지 못했지만, 당당하게 백성들에게 물어보라! 외치시면서 오히려 그들을 심문하신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을 가장 잘 알고 깨달아 따라가야 했던 “율법학자들, 제사장들”인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주님은 자신들의 삶의 안정감을 헤치는 불순한 도전자일 뿐이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상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안나스 앞에 선 주님의 당당한 모습을 상세하게 다룬 것은 안나스에게 재판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재판 받는 안나스를 비롯한 비열한 종교기득권자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당당한 주님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손바닥”으로 치는 폭력과 억압 뿐이었다. 그들의 권위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서슴없이 행사하는 “손바닥 힘”이었다. 폭력과 억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짖누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였다. 주님은 당당하게 그들을 재판하셨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베드로…. 스스로 잡혀 주신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랐다. 기록에 의하면 주님을 잡기 위해 약 600여명의 군사와 사람들이 동원 되었다고 했으니 베드로가 그들 무리 틈에 섞여 뒤따르는 것은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베드로와 함께 잡혀 가시는 주님을 뒤따른 ‘다른 한 제자’는 사요 요한이다. 주님을 붙잡아 환호하는 무리들 틈에 두 제자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함께 안나스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붙잡히신 주님과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 보았다. 함께 있는 것도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베드로의 마음은 심란 하기만 했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따스한 모닥불을 쬐며 안나스의 집에서 벌어지는 재판에 촉각을 곤두세웠겠지만,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당당하게 주님을 찾아 붙잡으려는 무리들에게 “내가 그니라”고 3번이나 반복하여 말씀 하셨다.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 뜰에서 “나는 아니라”는 부인을 3번 반복하였다.

*주님을 닮아 가야지 하는 마음에 “내가 그니라”처럼 늘 대답하기를 결심하지만, 현실은 “나는 아니라” 외치는 베드로의 고백이 반복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깨닫고 있으면서 삶의 여러 정황에 이끌려 “나는 아니라”고 외치는 모습이 영락없이 베드로와 같다…그러니 2천년전 베드로가 여전히 나의 삶에 투영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주님의 뜻 앞에 “내가 그니라”고 외치셨던 주님처럼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지… 순간 순간 “나는 아니라” 말하고 싶은 유혹이 들때, 안나스 뜰의 모닥불 앞에 서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주님, 종교기득권이 주님의 교회를 허물지 못하도록 지켜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을 따라 언제든지 “내가 그니라” 선언하며 당당하게 살아보겠습니다.
**주님, “나는 아니라” 부인하는 베드로의 연약함을 정죄하지 못하겠습니다. 나에게도 “나는 아니라” 외치고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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