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께서 죽으셨다! [요 19:31-42 ]
 – 2022년 04월 16일
– 2022년 04월 16일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은 예언하신 대로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부활(복음)증거의 사명을 맡기셨다. 특히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 가장 먼저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한달음에 달려와 세마포와 얼구을 감쌌던 수건만 남겨진 빈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남아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두 제자는 주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얼굴 수건이 남겨진 채 비어 있는 무덤을 “보고 믿었다(8절)”.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믿었다는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자신과 베드로의 모습을 회상하며 해석을 해 놓았는데,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새번역_9절).’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의식조차 못하고 빈 무덤만 확인하고 씁쓸히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10절).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 밖에서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다가 베드로와 요한처럼 몸을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11절). 놀랍게도 무덥 속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주님의 시신이 뉘여 있던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앉아 있었다(12절). 그리고 천사들이 마리아게 물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새번역_13절).”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새번역_14절).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묻는 주님에게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새번역_15절).”

*참으로 대단하고 간절한 부탁이다. 일곱 귀신에게 장악 당하여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던 비참한 지경에서 건져 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공회의 출교 결의도 있었고, 주님이 그들의 손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떤 불이익을 당하여도 주님의 시신을 찾아 다시 장사 지내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결연하다. 물러섬이 없다.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나가시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다. 만약 조금이라도 빈 무덤과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 있는 시신을 감쌓던 세마포와 얼굴 수건을 보고 그 약속을 기억 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에게 묻는 이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그녀의 마음이 귀하면서도 아쉽다…. “부활의 약속”을 이 정도로 생각해 내지 못하다니…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주님께서 너무도 잘 아셨다. 그래서인지 곧이어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깜짝 놀란 마리아가 돌아서서 “라부니(아람어_나의 선생님)”하고 외쳤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빈 무덤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녀에게 주님의 음성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일곱 귀신에게 눌려 괴롭힘을 당하던 소망 없던 그 때, 사람들로부터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며 저주하고 피하기만 했던 그 때, 주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 내 주셨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던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이후 자신의 재산으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기며 함께 동행하였다.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마 27:56). 돌아가시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새 무덤에 장사 지내는 모든 과정도 함께 했다. 또한 안식일이 시작 되기 전 급하게 안식일 이후 주님의 시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향품과 향유 까지” 준비하였다.

*안식일이 지나 이른 새벽에 누가 1톤이나 되는 무덤을 막은 돌을 치워줄까 걱정하면서도 한 걸음에 주님이 안치된 무덤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던 것이다. 마태는 요한보다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한 일에는 주님께서 죽으셨더라도 끝까지 변함없이 감당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다, 문득 주님께서 날 돌봐 주시지 않는다. 어디 계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등등 주님 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때에도 마리아처럼 더욱 주님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마리아는 두 제자가 빈 무덤을 둘러보고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울고 있었다. “머물러” 있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빈 무덤을 구부려 살펴 볼 때 두 천사를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부활의 첫 목격자, 첫 증인은 그렇게 “머물러” 있던 마리아의 몫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오랜 코로나 방역이 내일이면 마스크를 제외하고 해제 된다. 이제 더욱 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 오랫동안 멈추었던 신앙의 기지개를 필 때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기지개가 무엇일까? 주님 앞에 나아오는 습관,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앞에 “머무르는” 습관이다. 머물러 있으면 은혜가 다가온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너무도 기뻤다. 주님께서는 그런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7절).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도록 아버지께로 올라가셔야만 하셨다(16:7). 성령을 보내 주시면 그 능력을 힘입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님을 붙들고만 있지 않고 제자들에게부터 달려가 전해야 할 소식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주님의 소식이었다.

*놀라운 것은 주님의 부활 하심을 가서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예전에 말씀 하신대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다. 유대인에게 죽음은 “음부로 내려가는 저주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졌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이를 하나님께 버림 받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저주로 받아 들이셨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전하라 하시면서 부활은 “올라가심”의 사건, 즉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의 영광이고 환희임을 강조한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다시 살아남, 소생)이 아니라 부활 하심으로 이루어진 “하늘로 돌아가심, 올라가심,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심을 전해야 한다.



나는?
*주님, 보고 느끼며 믿는 것 보다, 음성을 듣고도 믿는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 동산지기로 보았지만, 음성으로 주님인 줄 알아 챌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 마리아를 본 받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누구에게서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듣고 싶습니다.
*주님, 더욱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말씀 앞에 머무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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