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의 주님을 믿다! [요 20:1-18]
 – 2022년 04월 17일
– 2022년 04월 17일 –

엘리의 두 아들들의 하나님을 향한 죄악과 경멸(멸시)의 모습이(17절) 어린 사무엘의 하나님께 대한 충실한 섬김(11, 18절)의 모습과 대조 된다.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성실하게 섬기는 이야기 사이에 엘리의 두 아들들의 죄악된 행실을 기록해 놓았다. 사사시대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악인이었다. 이 모습이 사무엘의 복된 성장 과정과 뚜렷하게 대조 된다. 이와 함께 꾸준하고 세심한 한나의 보살핌을 통한 교육과 엘리의 형식적인 훈육도 대조를 이루며 이어진다.



1.엘리의 아들들_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다(12-17절)
엘리의 아들들을 묘사하는 말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절)”이다. “행실이 나빠”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개역한글은 “불량자”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사사기 19장의 기브아 사건에서 사용 된 단어다. 집주인에게 레위인을 욕보이려고 내어 달라고 요구한 그들을 “불량자(브네 블리야알)”로 기록했다. 직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이며, 우리말로는 “무가치한 자들”, “쓸모없는 자들”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들은 하나님이 정한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의 직무를 맡으면 안 되는 이들이었다.

또 여기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지칭했다. 충격이다. 이 말은 “율법적인 지식”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이 없었다”는 의미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실존적 만남을 경험한 한나와 이들의 영적인 무지가 너무도 선명하게 대조가 된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 이라는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직분을 자신들의 탐욕을 취하는 직분으로 악용한다. 13-14절은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취한 당시의 관행에 대해 설명한다. 제물을 잡고 기름을 태워 여호와께 드린 후 나머지 고기를 삶을 때 제사장의 사환이 갈고리를 찔러 걸려 나오는 것만 제사장에게 가져 간다. 사실 이런 관행은 율법의 규정이 아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은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였다. 사시시대는 성소에서도 하나님의 규정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고 무시 되었다.

여기에 엘리의 두 아들들은 율법의 규정과 맞지 않은 이 관습을 더욱 악용했다. 사환이 세 살 갈고리를 사용했다는 점(13절), 냄비, 솥, 큰 솥, 가마 등(14절) 가리지 않고 찔러서 가져 갔다는 점은 이들이 당시 제사장의 관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데 최적화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15-17절은 아예 제물의 잡고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고기를 달라고 강요하는 사환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신들의 몫을 먼저 챙기는 탐욕을 드러낸 것이다. 제물로 드려진 고기는 삶아서 먹어야 한다(출 29:31, 레 8:31, 신 16:7)는 규정도 무시하고 자신들이 생고기를 구워서 먹고 싶어 벌인 짓이었다. 문제는 이런 짓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고의적 이었다는 데에 있다. 16절에서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억지로(베호즈카)”라는 단어의 의미는 폭력을 사용해서 라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 시키겠다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율법을 악의적으로 어기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가 있을까?


*17절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과 실존적 만남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의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삶의 모습이었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명을 스스로 멸시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들의 악행은 이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악행을 더 고발하기 전에 한나와 사무엘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2.사무엘_여호와를 섬기니라,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11, 18, 21절)
성전에 바쳐진 사무엘이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라고 기록했다(11절). 그런데 18절에서는 “….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라고 기록한다. 한나가 기도한 대로 사무엘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훈련 아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고(1:11), 그렇게 태어난 사무엘의 젖을 떼면서 “여호와 앞에 서게 될 것(1:22)”,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8절)”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사무엘은 실로의 성소에서 “여호와를 섬겼고(11절),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18절)”라는 말씀을 통해 한나의 입술로 고백한 것을 이루게 하셨다.

*한나의 기도와 다짐이 성취되고 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자라났다(21절).



3.한나_최소한의 만남, 드러나지 않는 깊은 기도의 양육(19-21절)
한나가 이제 막 젖을 뗀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려서 실로의 성소에서 자라게 했다. 그렇다고 영영 이별한 것이 아니었다. 한나와 엘가나는 매년 가족들이 실로에 올라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다. 사사시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예전과 다름 없이 지속적으로 매년제를 드리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나는 직접 만든 작은 겉옷을 사무엘에게 가져다 주었다.

매년제를 자신의 삶에 자식이 없어 절망스러웠던 것을 끝냈던 결정적 기회로 삼았던 한나가 그렇게 사무엘을 낳고 젖을 뗀 후 여호와께 드린 후에는 또 다시 매년제를 사무엘을 만나는 결정적인 기회로 삼는다.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예배)가 자칫 형식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예배를 통해 한나가 그랬던 것 처럼,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자라는 아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결정적인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작은 겉옷”은 사무엘에 대한 한나의 지속적인 사랑과 교육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계속 성장하는 아이의 몸에 맞는 옷이 해마다 필요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지 예측하여 옷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대에 옷을 만들려면 재료 생산에서 가공, 직조 등 모든 공정을 스스로 해야 했기에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어쩌면 매년제를 드리고 돌아오면 곧바로 준비하여 1년 여를 내내 정성을 다해 수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단지 옷만 만들었을까? 아니다. 옷을 만드는 기간 내내 사무엘을 위해 기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맡겼지만,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한나가 “작은 겉옷”을 만드는 영적인 정성과 육적인 사랑처럼 양육하면 좋겠다. 엘리 제사장과 360여일을 함께 하는 시간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께 늘 사무엘을 위탁하고 손수 옷을 만들며 아이의 성장을 상상하며 드린 기도의 힘으로 함께하는 단 며칠이 훨씬 큰 영향력을 끼쳤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단 며칠의 만남이지만 매일 “작은 겉옷”을 만들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실존적인 만남을 가졌던 한나의 영성이 흘러 나왔다. 늘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한나에게 하나님의 영은 충만하게 거하였을 테고, 매년 그런 어머니 한나를 만날 때 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너무 깊게 생각했을까?).

*최소한의 만남 시간이었지만, 깊은 양육이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이다. 영적으로 둔탁한 사사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로운 양육이셨다.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와 헌신으로 “여호와 앞에서 자라났다(21절)”

*하나님의 아이들은 하나님이 키우신다. 어미의 기도와 헌신이 이를 깨닫게 한다. “작은 겉옷” 만드는 정성 속에,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채울 때, 어린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건강하고 야무지게) 자라갔다!”



나는?
-엘리의 두 아들들의 하나님을 멸시하는 모습과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자라나는 모습이 “대조”가 된다.

-엘리는 탐욕스러운 두 아들들이 반드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지켜야 할 성전에서 조차 자기 탐욕을 따라 하나님의 것을 갈취하고 백성들을 협박하고 억압하는 것에 어떤 훈계도 하지 않는다. 매일 성소에서 함께 지내지만 방치하고 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이토록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거의 매일, 커가는 아들 사무엘의 치수를 상상하며 “작은 겉옷”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한땀 한땀 짜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볼 수 없고, 직접 가르칠 수 없지만,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시선이 사무엘에게 고정 되기를, 하나님의 손길이 사무엘을 붙잡아 만져 주시기를 기도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사무엘은 한나의 보이지 않는 영적 양육을 힘입어 “여호와 앞에 서고,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 앞에서 자라났다!” 하나님께서 키워 주셨다.


*한나가 해마다 매년제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가는 길에 아들 사무엘과 보내는 단 며칠이 사무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은 분명 한나에게 제약 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제약일 수 없었다.

*나도 하나님께서 나의 세 자녀들을 “여호와 앞에 서고,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하며 “작은 겉옷”을 준비하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겠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세 아들을 맡기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겠다.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것을 신뢰해야 겠다.

*적어도 엘리의 두 아들들과 같이 “행실이 나쁘고, 여호와를 알지 모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해야지… 자기 탐욕에 이끌려 살지 않도록 해야지…



*주님, 엘리의 두 아들들과 사무엘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자식 농사는 부모의 지위가 아니라 기도와 사랑으로 키우는 것을 다시 깨우칩니다.
*주님, 나쁜 행실, 턱없이 무식한 하나님 지식 때문에 겁도 없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여호와 앞에 서고,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로 양육해 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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