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믿게 하려 … 나사로야 나오너라! 너희로 믿게 하려… [요 11:38-46]
 – 2022년 02월 08일
– 2022년 02월 08일 –
함께 곡하러 온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에 더욱 비통히 여기신 주님의 발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멈춰 섰다.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난 무덤에서는 벌써 악취도 풍겨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죽었고 시신은 썩고 있다는 것이다. 무덤 입구를 가로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마르다는 냄새가 풍기는 무덤의 돌을 왜 옮겨야 하는지 되묻는다. 이에 주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새번역_40절)”고 말씀 하신다.

무덤의 돌을 옮기고 난 후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이 표적을 통해 무리들이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42절)이라고 고백하신 후 모인 모든 무리들이 듣도록 큰 소리로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43절). 열려진 무덤 입구로 “얼굴이 가려지고 수족을 동인 채로”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나오는 나사로를 위해 주님은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새번역_44절)”고 말씀 하신다. 나사로는 진실로 살아난 것이다. 이 놀라운 일로 인해 주님께서 말씀 하셨듯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새번역_45절).


1.불신과 한계의 돌, 세마포를 치우라(39-40, 44절)
비통한 심정으로 나사로의 무덤에 선 주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아라고 말씀 하신다. 이때 누이 마르다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 라고 말씀 드린다.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받아 들였다. 아무리 비통한 표정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도 “죽음”의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너무 슬픔 마음에 그리 말씀 하신 것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마르다를 일깨우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새번역_40절)” 강한 충격이 왔을 것이다. 그저 위로해 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려니 라고 여겼는데, 너무도 확신 있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어쩌면 매우 화가 난 모습처럼 느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는 하지 않으셨다. 요단 건너 편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아래 베다니로 출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4, 15절). 시선은 마르다에게 향하여 하신 말씀이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제자들의 귓전에 쩌렁 쩌렁 울렸을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이건 안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다구! 아무리 무수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이시라도 이건 불가능 하지… 이제 막 죽은 소녀를 일으키셨더라도…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썩은 냄새도 난단 말이야! 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니….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을 나온 나사로의 세마포를 벗겨 주라고 말하실 때 즉시로 달려가 세마포를 벗긴 이들의 순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마포로 꽉 묶인 시신이 세워져서 무덤 밖으로 나온 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일 수 있겠다. 하지만 다가가 세마포를 벗긴 이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도 기억해야 한다.

*무수한 표적들을 보았고, 기적의 현장을 함께 걸어온 제자들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뿐 아니라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은 이 기막힌 주님의 명령에 한결같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무수한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셨던 일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나에게도 이런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것은 될 수 있고 저것은 불가능 할 거야… 아무리 주님이 오셔도 될 수 없어…” 라고 쉽게 생각하는 믿음을 가로막는 돌이 나에게도 분명 있다!

*내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한계, 상식의 끝을 뛰어 넘기 위해 그 돌을 옮겨 놓아야 하는데… 역시나 생각만 깊어지는 아침이다. 믿음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계산법이 아니라 그저 돌을 옮기는 행동인 것을….


2.믿음을 가르치시는 주님(41-42절)
불신의 한계를 넘어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사람들이 옮겼다. 개역 개정은 누가 돌을 옮겼는지 번역되지 않았다. 다른 번역본들은 “사람들이” 돌을 옮겼다고 기록한다. 주님께서 선언하신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는 그 외침에 반응한 이들일 것이다. 주님의 외침에 믿음으로 반응한 “그 사람들이” 믿음과 상식의 한계를 스스로 굴러 옮겼다. 나도 “그 사람들”처럼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삶이 되어야지 결심해 본다.

그리고서 주님은 곧바로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둘러싸서 보고 있는 무덤 앞에서 “굳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41절)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41-42절).”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 그들이 주님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언제나 들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새벽 미명에 하나님과 기도 하시며 사역을 의탁하였던 그 모습을 일부러 노출을 시키신 것이다. 이유는 순전히 “둘러싼 무리”에게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였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으로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단지 기적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듣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게 하시려고 자신을 보냈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행동이라는 것이다.

*단지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표적을 행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생의 주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만 행하는 주님을 믿는 것 만큼 어리석은 믿음은 없다. 기적을 경험 했다면 그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기적이 나에게 일어났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다.

*기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계기, 통로일 뿐이다.


3.생명을 일깨우는 주님의 음성(43-44절)
마르다에게 시체 썩는 냄새가 주님께는 생명의 향기 셨다. 이미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 들었을때부터, 그가 죽은 것은 것을 아시고서도, 이틀을 더 머무시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을 알았기에 외적인 어떤 조건도 장벽이 될 수 없었다. 이미 살아날 것을 아시고 행하시는 걸음은 머뭇거림이 없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다. 마치, 집안에 잠 자고 있는 이를 깨워 나오게 하는 듯이 “살아나라!”, “깨어나라!”가 아니라 단지 “나오너라!”였다. 그렇게 응답하여 나온 나사로의 온 몸을 묶어 놓은 세마포를 풀어 주라고 하시고 그가 자유롭게 다니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다.

*살아난 나사로의 세마포를 풀면서 그들은 어떤 마음 이었을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짧은 순간 그들의 마음은 어떤 소리로 가득 찼을까? 세마포에 감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명을 일깨우는 소리에 반응하며 함께 깨우쳐 지는 삶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 모르겠다.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서도 구경꾼처럼, 방관자처럼, 비아냥 거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일러 바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나는?
-주님은 본문에서 다시 한번 “비통(엠브리마오마이)”해 하신다. 이 단어는 “매우 분노하다, 분개하다, 화가 나서 씩씩 거린다”는 의미가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5회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요한은 이 단어를 주님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했다. 33절에서 사용된 ‘비통’은 죄와 사망의 억압 아래 있어 죽음의 지배를 받는 인생들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본문의 분노는 결이 조금 다르다. 38절의 ‘비통’은 37절의 일부 유대인들의 ‘맹인을 눈 뜨게 한 사람이 나사로는 왜 죽게 내버려 두었는가?’ 라고 비아냥 거리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마치 주님의 잘못인양 함부로 말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이다. 이들은 아무리 진리를 들려주고 보여 준다 한 들 변함없이 조롱하고 불신하며, 비아냥할 사람들이다. 진리를 들어도 거절한다. 진리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진리가 싫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향해 주님은 “비통(분노)”하셨다.

-신앙생활 하면서 “비아냥, 비웃음, 조롱, 불신조장’등을 자연스럽게 하는 성도들이 분명히 있다. 그들은 어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부류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돌을 옮기고, 세마포를 걷어내는 신앙으로 서야 겠다. 지금 당장 전심으로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이성이나 상식, 지식의 편견이 믿음에 대하여 분명한 한계선을 설정하고 있어도, 담대하게 이 한계와 같은 돌을 굴러 내야 겠다.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임을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다(45절). 하지만 함께 있었던 어떤 이들은 이 일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어떤 이들은 믿었고, 어떤 이들은 신고했다.

-모두가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를 마주하여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조롱하고 내팽개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진리를 듣고 진리에 반응하여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물러서지 않겠다.


*주님, 주님이 비통해 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음성에 나사로가 깨어났듯, 나도 날마다 반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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