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표적에 대한 반응들…
 – 2022년 02월 09일
– 2022년 02월 09일 –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현장에서 지켜본 많은 유대인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믿었다. 하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이 일을 고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출교 당한다는 포고령을 이미 내렸으니 이들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아… 생명의 부활을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전통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율법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지켜본 사람들이기에 충격이다. 관습적인 굴레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다. 생명의 부활의 감격보다,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서 고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맹신적인 전통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섭다. 주님께서 행하신 생명의 부활을 목격 하고서도 틀에 박힌 종교 윤리에 철저 하다니… 이리 무지하게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아… 속상하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산헤드린 의회는 발칵 뒤집힌다. 즉시로 의회가 소집되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려를 표한다. 그런데 그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이 놀라운 기적을 “로마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로 바라보면서 해석한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f 또는 ‘성전’)_(새번역_48절)”

“땅(토포스)”으로 번역된 단어는 ‘장소, 곳’을 의미한다. 즉 성전을 가리키는 용어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자신들의 성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줄 민족이 주님으로 인해 로마로부터 위협 당하면 안된다는 논리다. 자신들의 안위가 주님으로 인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억측이다. 이런 표적을 일으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테고 그러면 로마 정부는 이것을 정치적인 혁명으로 간주하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인 자유조차 빼앗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심문하는 빌라도 조차 주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했다고(요 19:4) 할 정도 였으니 이들의 억측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산헤드린 의회는 성전의 안전과 백성들의 안위를 핑계 하여 자신들의 기득권만 유지하고 누리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일갈했던 “몰지각한 탐욕스러운 자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이들(사 56:10-11)”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하아…속상하다.


한편 이런 정치적인 의견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처방은 확실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새번역_49-50절).” 그는 먼저 우왕좌왕하는 의원들을 책망하고 지금 의회가 고려해야 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정리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 따위는 관심 두지 않고 오직 산헤드린 의회의 유익 만을 고려 해야 하고 그러려면 주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어야 온 민족이 망하지 않을 것이고 의회도 유익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아… 예레미야의 탄식이 절로 생각난다.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렘 50:6)” 하아… 속상하다. 속상하다…


그런데 요한은 가야바의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새번역_51-52절).” 라고 했다. 가야바는 오직 자기 종교 권력과 의회 만을 위해 한 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악한 가야바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선포하신 것이다. 매우 악한 의도로 말했지만, 이를 통해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악한 자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악인이 아무리 기고 만장 하여 악한 말로 한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 이런 대제사장 가야바의 악한 검은 속내가 너무도 화가 난다. 하아… 그래서 더 속상하고 속상하다…


이 날부터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53절).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자 예루살렘 전역에 주님의 위치를 고발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57절). 그들은 유월절 명절에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계획한 것이다. 이런 모의가 작당되고 있을 때 주님은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에 계셨다. 잡아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종교지도자들…. 이를 아시면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시는 주님….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유대인들의 태도이다. 갈릴리에서의 수많은 기적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에서도 1년 전에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고, 몇 개월 전에는 날 때부터 맹인의 눈을 고치셨으며, 며칠 전에는 죽은 지 4일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이런 놀라운 생명의 주님의 역사를 보고, 들었으면서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예수 검거령”에 부화뇌동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찾다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오지 않겠습니까?(새번역_56절).” 하아… 속상하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고민도 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권력화된 종교 지도자들만 쫓는 사람들이라니…



나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살아 났을 때, 어떤 이들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그 자리에서 믿었고, 어떤 이들은 빨리 주님이 베다니에 나타난 이 사실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야 겠다고 행동했다. 생명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엇나간 지도자들의 명령만 쫓았다. 아… 이런 무지한 유대인들이라니… 그런데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도 보인다. 말씀보다 전통적인 견해에 더 가치를 두고 행하는 모습에서 저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릴 적 목사님에게 들었던 말들이 말씀과 충돌할 때 세뇌된 그 가르침이 말씀의 의미보다 더 우선이었다. 더 가치있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맹목적인 믿음이다. 더 심각한 것은 말씀과 충돌할 때 의심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 말이 진리겠지 했던 것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어떤 이들에게는 평생의 신앙 가치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듣고 싶은 인기몰이식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탄식과 같은 것이 주님이 오신 시대에도 여전하다. 그런데 그 탄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느 시대든 완벽하게 말씀의 가치와 의미가 올바로 실현된 시대는 드물다. 하지만 내가 거하는 바로 그곳 만이라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되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할 때, 홀로 순종 하는 용기가 믿음이 있다고 고백한 이들에게서 보여져야 한다.


-부활의 생명 되신 주님의 놀라운 표적의 현장을 지켜 봤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면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유대인 무리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전통과 가르침을 붙들고 살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치관, 권위, 욕심을 내려 놓지 못했다. 자신들의 세상 권력과 욕심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들어 올 공간은 없었다.

-주님을 주님 답게 경험 하려면 자신의 관점, 욕심, 방법을 내려 놓아야 하지만, 여전히 그런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이 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장벽이 될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나의 욕심과 주장, 관점을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이 보이시는 비전을 따라 욕심과 관점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책임져 주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부화뇌동(아무런 주관이 없이 남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좇아 함께 어울림)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늘 말씀에 깨어 있어야지… 지도자들이 한 말에 권위를 두지 않고 성경의 기록된 말씀에 권위를 두고 분별해야지… 이제껏 지켜온 전통이라도 말씀과 충돌 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치열하게 말씀대로 되돌리기 위해 싸워야지…

-부화뇌동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에 무감각한 것이 더 문제다. 더욱 더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기 위해 도와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지…


-악한 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신다. 성령께서 이런 이들에게서 듣는 말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 한다. 나를 시험 들게 하려고 하는 말이지만, 성령께서 이를 들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우치는 말로 듣게 하신다면 스스로 시험들 일 없지 않겠나!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악한 말로 겁박 하여도 그런 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깊은 비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깨우쳐 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 전통, 관습에 따라 부화뇌동 않겠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을 깨우쳐 주시는 성령님 더욱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권력화된 종교 지도자이기 보다 말씀을 더욱 겸손하게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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