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요 12:1-11
 – 2022년 02월 10일
– 2022년 02월 10일 –
유월절을 엿새를 앞두고 있는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주님께서 베다니의 잔치에 참여 하신다. 문맥으로 본다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가족이 주님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주님께 각기 최선을 다해 다시 살려 주신 은혜에 반응하여 감사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고자 공식 포고령까지 내려진 상황에서(11:57) 나사로는 기꺼이 주님과 제자들에게 거처와 잔치를 마련하였고, 마르다는 잔치 음식을 준비하고 섬기는 모든 일을 도맡았다(2절).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혼수품이었던 “순전한 나드 한 근(325g, 약 330ml)”을 깨뜨려 주님의 몸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3절). 향긋한 내음이 집안에 진동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룟유다는 겉보기에 ‘합리적인 지적’을 한다.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좋았을 텐데 왜 그랬냐는 것이다(4-5절). 요한은 ‘그는 도둑이다’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빼돌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했다(6절).

한편 베다니에 예수께서 계신 줄 알고 “유대인의 큰 무리”가 몰려 왔다. 예수도 보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었다. 이를 바라보며 대제사장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행동’이 점점 더 과감해 진다.



1.가장 큰 사랑, 가장 큰 헌신(1-3절)
마리아에게 오라비 나사로의 존재는 부모와 다름 없었을 것이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죽어서 나흘 동안 진행된 장례기간은 누구보다 더 좌절하고 슬펐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절망의 시간속에 고통스러워 하는 자신을 건져 주셨다.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였고 큰 사랑 받음 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답할까 늘 고민했을 것이다.

놀라운 부활의 기적을 맛보았지만, 보답할 겨를도 없이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해 주님은 에브라임 빈들로 떠나셨다. 속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월절 명절 기간이 되어가자 주님께서 다시 베다니로 오신 것이다. 나사로 남매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는 자는 출교될 것이라는 엄한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맞아 들였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주님을 지극히 섬긴다. 나사로는 자신의 집을 주님과 제자들에게 제공하고 마르다는 그 많은 일행들이 먹을 음식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지도자들의 위협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두 가지 헌신을 드린다. 먼저 애지중지 모았던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들고 주님께서 식사하시는 자리로 나아갔다. 그리고 주저 없이 깨뜨려서 주님의 몸에 부었다. 순식간에 온 집안에 향긋한 향기가 퍼졌다. 이 향유의 값어치에 대해 요한은 가룟 유다의 말을 빌어 “삼백 데나리온(노동자 일년치 품삯_주 6일 노동 기준)”이라고 기록한다. 놀라운 금액이다.

상식적이지 않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저 없이 드렸다. 주님께 받은 큰 사랑에 비하면 일년 치 품삯의 값어치는 고민할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소중한 것”을 “다” 드렸다. 주님께 받은 사랑은 그보다 더 컸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는 마리아의 행동이다. 단지 물질로만 드린 것이 아니었다. 그 비싼 향유를 깨뜨려서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 진심인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다. 고대에서 다른 사람의 발 앞에 엎드리거나 그 발을 붙잡고 입을 맞추는 것은 철저히 낮아짐의 행동이었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의 헌신을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의 값어치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가 엎드려서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항유의 값어치 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헌신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만큼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 주신 주님의 큰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지 반응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행동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너무 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그 정도로 소중한 분이셨다. 일년치 품삯을 한 번에 깨뜨려 드려도 그것이 과한 낭비가 아니었다. “이것으로 라도,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서 흘러 내리는 향유를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 마리아는 진심이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마음가짐은 어떤지 되돌아 보게 한다. 물질 뿐 아니라 마음도 그와 같이 드리는가? 드리는 물질의 값어치보다 드리는 마음이 이처럼 진심인가? 아니면 계산적인가?

*마리아가 드린 헌신은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분명 어리석은 낭비이다. 하지만 마리아 자신은 “기꺼이 드린 헌신”이다. 주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와 그 크신 사랑에 대한 “진심”이었다. 주님께 받았으니 그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마리아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재물과 마음(태도)를 주저함 없이 드렸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 주님께 드릴 것이 아까울 것이 없다. 세상이 보기에 낭비인 헌신이 그에게는 너무도 귀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럼 마리아만 헌신했을까? 아니다. 나사로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맞아 들였다. 11:57에서 이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신고하라고 포고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들은 무조건 출교였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가장 두려운 처벌 중의 하나였다. 어디를 가든 공동체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위태로운 삶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사로는 받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르다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음식을 준비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흥이 났을 것이다. 공회의 포고령 따위는 상관 없다. 나라소 남매들은 이미 죽음의 절망을 맛보았고 거기에서 부활하는 생명의 은혜를 맛보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부활이 실제가 된 그들에게는 산헤드린 공회의 포고령 따위가 주님을 맞이하고 섬기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나도 그래야지… 주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 삶의 모든 여정 속에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의 흔적을 생각하면 세상의 위협이나, 조롱이 주님을 더욱 선명하게 섬기는 것에 문제가 될 수 없다. 세상이 뭐라해도 주님 섬기는 기쁨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2.탐욕을 가린 직분(4-6절)
가룟유다가 멋있는(?) 말을 한다. ‘에고야.. 그거 팔면 삼백데나리온쯤 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구제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이다. 메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다. 마리아의 마음이다. 마리아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구제의 중요성을 몰랐을까? 아니다. 너무도 잘 알았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함께 슬퍼 했다는 기록은 그들 남매들이 평소에 얼마나 덕을 쌓는 삶을 살았는지 짐작 케 하고도 남는다. 마리아는 구제의 중요성을 삶으로 잘 실천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내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보다 주님께 더 큰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늘 주의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신앙적인 행동을 함부로 나의 기준을 따라 판단하면 안 된다. 주님과 그의 관계에서 표현되고 드려지는 것을 나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때로 상식을 넘어서는 헌신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함부로 논평 하면 안 된다. 그 논평 속에 진심이 드러난다.

요한은 가룟유다가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새번역_6절)” 개역개정에는 ( )가 없지만 다른 번역에는 ( )를 사용했다. 이것은 요한의 해석이라는 표시이다. 요한은 가룟 유다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잔치가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곧바로 안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그에 대한 평가가 제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확정이 되었을 것이다. 주님을 팔고, 자결한 그의 삶을 규정할 때 다른 제자들도 이처럼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운 것은 그는 3년동안 주님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함께 했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한 시간이 남들보다 더 많다 한들 주님에 대한 마음과 자신의 태도가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우스개 말이이지만 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가룟유다는 자신의 소신 하나 변화 되지 못했다. 시각과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신앙은 상식과 합리성의 틀에 박혀 있으면 생동감이 없다. 옳은 말인 것 같지만 겉으로 보이고 들려지는 옳은 소리대로 사는 것은 별개이다. 요한은 가룟 유다는 “도둑”이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후원한 물질을 관리하는 회계의 직분을 맡았지만, 주님과 제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사용했다. 명백한 횡령이고 배임이다. 직분 속에 탐욕이 넘실 거렸다.

*마리아의 헌신은 근래 보기 드문 헌신이었다. 물질 값어치로 따지면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계산한 것은 향유의 가격이었다. 마리아의 드리는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다. 마태는 제자들이 분개 했다고 기록했다(마 26:8). 제자들은 하나같이 낭비라고 여겼다.

*제자들의 시각이 때로 나에게도 발생할 때가 있다. 그래서 분별력이 중요하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고 구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반응을 보기도 전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자기 생각”, “자기 의견”을 쏟아 낸 것이다.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마치 자기가 주님처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 처럼 착각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실 때 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신앙의 지혜일 때가 있다.

*선뜻 판단하여 말하는 것 보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고 기다리는 영적인 지혜와 성숙함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3.주님의 해석(7-8절)
주님은 자신에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며(마 26:10) 두 가지로 마리아의 헌신에 감동 하셨다. 먼저 자신의 장례를 예비 했다는 것이다(7절). 그런데 표현이 참 의미 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새번역_7절).” 마태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새번역_마 26:12).”

주님은 마리아의 비싼 항유를 깨뜨림이 당시 일반적인 장례의 자리에서 시신에 향유를 붓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장례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셨다. 물론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 행동에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며 위로를 받으셨다.

*아… 나의 주님을 향한 행동이 이렇게 주님께 위로, 기쁨이 되는 것 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주님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 도리어 주님의 근심이 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으로 미리 받으셨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 전, 스스로 위로로 받으신 것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새번역_8절).” 이라고 하셨다.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늘 같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때는 “언제나”이기보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는 늘 나와 함께 하신다. 하지만 성령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감동을 주시는 때는 “모든 시간”이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주님의 그 큰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다. 언제 이런 기회가 올 지 모른다.

마리아가 이것을 미리 알고 헌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하여 온 가족이 힘을 다해 섬기는 지금 이때가 아니면 의미가 퇴색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주님은 잘 아셨다. 그래서 매우 합리적으로 질책하는 제자들을 향해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삶의 제목들을 허락하실 때 주님의 뜻, 주님의 시간을 놓치지 않는 신앙 이었으면 좋겠다. 주님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삶 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장 귀한 것, 가장 최선의 섬김의 행동을 함께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집안 가득 향내음”이 풍기게 했다. 나도 주님을 위한 물질과 마음을 함께 드리는 순전한 헌신으로 주님의 향기를 진동하게 해야지…

-주님을 위한 잔치가 진정한 주님을 향한 잔치가 된 것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순수한 사랑의 향내가 가득 넘쳤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예수 향기 가득하도록 살아내야지… 행동해야지…

-이런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헌신은 없고 가룟 유다처럼 계산이 앞서는 신앙으로 변색 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룟 유다의 왜곡된 마음이 아니라 마리아의 순수한 마음을 갈망한다.



*주님, 지금 주님의 마음에 감동 되도록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썩은 내 진동하는 악취 교회가 아니라 주님 향기 솔솔 넘치는 향기 교회 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