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입성하는 길에서… 요 12:12-19
 – 2022년 02월 11일
– 2022년 02월 11일 –
주님께서 이튿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다. 그 길로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몰려 나와 호산나 외치며 맞이한다. 하지만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마저도 성경의 예언대로 순종하신 것이었다. 이렇게 열열히 환영하는 ‘큰 무리’는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본 이들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나사로 죽이는 일을 접는다.


1.사람들이 기대하는 왕(12-13절)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하는 모습은 마카비 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던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 원정에서 실패한 후 더욱 강력한 헬라화정책을 취하는데,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다. 이에 동조하는 유대인들과 왕의 사신을 시골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가 다섯 아들을 데리고 살해하고 유대광야에서 봉기했다. 이 전쟁을 마카비 전쟁이라 하는데 맛다디아 사후 셋째 아들이었던 유다 마카비가 마침내 BC 164년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고 성전을 정화 하였다. 이때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마카비 군대를 환영하였다. 이후 시리아는 몰락의 길을 가고 유대지역은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과 시몬이 뒤를 유대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벨론에게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비로소 독립국가를 이루게 된다. 이 왕가가 바로 하스몬 왕가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하스몬 왕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후에 율법에서 정한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을 폐한다. 종교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 회복과 성전 제사 회복하고 정결케 하는 것이 목표 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율법대로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율법이 정한 것은 무시하고 말았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유다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방세력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강력한 나라에 대한 열망이 깃들어져 있었다.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직접 보았던 이 무리들은 주님에게 “강력한 힘의 나라, 로마를 무너뜨릴 권능”을 열망하며 마치 마키비 혁명 때 예루살렘을 수복하였던 그 심정으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만 숭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제한이 없지만, 온 인류를 죄악에서 건지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음을 잊으면 안 된다. 힘으로 쟁취하는 나라는 힘에 의해 망한다. 사랑으로 얻은 나라는 사랑안에 영원하다.

*혹시 나도 주님을 향해 내 인생의 반전, 대박을 열망하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흔들어야 할 종려나무 가지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기 보다 순간 순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위한 흔듬이어야 하겠다.


2.겸손과 온유의 왕(14-16절)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셨다. 사실 굳이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은 3km남짓 되는 거리 밖에 안되고 감람산 정상을 넘어 쭈욱 내리막길이다. 굳이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까지 타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주님은 굳이 타셨다. 왜 그러셨을까?

사도 요한은 당시에는 이를 깨닫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영광(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을 받으신 후에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이 행동은 성경의 스가랴 9:9의 예언대로 순종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주님께 마카비와 같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독립시켜 줄 강력한 제왕을 기대하며 환영 했지만, 주님은 성경의 말씀대로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며 나귀 새끼를 타실 정도로 겸손하신 왕(슥 9:9)”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아쉽게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많은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는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듯 한다. 이 땅에서 강력한 힘의 지도자를 추구하고 왜곡된 통치 방식이라도 경제만 잘 이끌어 준다면야 하면서 머뭇거리지 않고 막무가내가 된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어떻해서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심을 분별하지 못하면, 교회는 언제든지 사회를 향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핑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의 교회들 중에 일부는 이미 이런 행동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깨닫게 된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통치 방식이 아닌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공의와 구원, 겸손와 온유함으로 살아내어 “사랑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도 예수님처럼 겸손과 온유함으로 주님의 공의와 구원을 삶으로 드러내며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나는?
-바리새인들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 더 많은 무리들로 불어나 주님을 환영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새번역_19절)”

-증언의 힘이 이토록 강력하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출교포고령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언하였다. 이 증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각지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환영 인파에 속속 합류했다(17-18절).

-전통과 제도에 익숙하여 사망의 모의를 따르던 이들이 속속 생명과 빛 되신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으며 주님에게로 돌아선다. 내가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선택할 것인지 분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탄한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을 따라간다.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생명을 따라간다. 나와 공동체가 생명의 말씀에 귀가 열려 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도 힘, 능력, 성공, 인정, 평판… 이런 말 참 좋아했다. 많이 갈급 하기도 했다. 되돌아 보니 주님은 내가 주님을 향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열렬히 흔들며 따라올 때 늘 “어린 나귀”에 앉아 계셨다. 변함 없는 모습으로 겸손과 온유함을 보여 주셨다. 사랑으로 대답해 주셨다. 그런데 나는 늘 종려나무 가지만 흔들어 댔다. 어리석었다.

*여전히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기도의 종려나무, 헌신의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며 따르는 이들이 여전하다. 그런 교회들이 여전하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아야 겠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셨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기 욕망을 갈급해도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셨다. 말씀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시기 위해 늠름한 백마가 아니라 연약하고 어리숙한 어린 나귀를 타셨다….

*나도 주님의 뒤를 따라 가야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힘, 성공, 명예)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꿋꿋하게 말씀을 알아가야지,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말씀대로 지켜야지… 그래야지…


*주님, 주님처럼 섬기기 위해 말씀대로 말씀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이 나라의 지도자가 힘을 숭배하기보다 섬김의 의미를 잘 아는 지도자가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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