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전히 믿지 않는 강팍한 그들… 요 12:34-43
 – 2022년 02월 13일
– 2022년 02월 13일 –
자신을 팔아 넘길 가룟 유다를 이미 알고 있음을 알려 줌으로서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날 때 이조차도 제자들이 주님의 주님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18-20절).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괴로워 하시면서 제자들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임을 재차 알리신다(21절). 제자들이 술렁이고 주님께 거듭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새번역_26절)”고 말씀하신 후 가룟유다에게 주시며,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새번역_27절)”고 말씀까지 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도리어 주님께서 유다에게 뭔가 일을 시키신 것 처럼 받아 들였다(28-29절). 빵 조각을 받아 든 가룟 유다는 곧 그 밤에 나갔다(30절).

주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끝까지 인내하신다. 요한은 주님의 이 모습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 조차도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임을 밝히며 기록된 대로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하는 행동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모두가 깨끗하지 아니하다고 말씀 하셨다(10-11절). 이어 누가 배반할 지 알고 있지만, 선명하게 밝히지 않으시며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이루어 질 것만 말씀 하셨다(18절).



1.유다를 숨기시는 주님의 사랑
자신을 배신할 이가 제자들 가운데 있음을 드러내신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술렁거렸다. 누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베드로는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물어보게 하였다(23-24절).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배신자가 누구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다. 분명하게 주님 자신이 알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만 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훗날 제자들이 이 일을 생각날 때 더욱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9절).

그렇다고 주님이 말만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다. 행동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가리켰다. 요한은 이 순간을 주님이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26절)”고 선명하게 기록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할 제자가 가룟 유다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분명히 알아챌 수 있도록 말씀 하시고 곧바로 떡 한 조각을 적셔 가룟 유다에게 주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대신 어떤 이는 그가 회계였기에 명절에 필요한 것을 사라는 의미로, 또 어떤 이는 가난한 자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갖다 주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29절).

제자들은 알아채지 못했고, 주님은 배신할 가룟 유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막힌 사실은 주님은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시고 3년 동안 그와 함께 복음을 가르치고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거기에 돈궤까지 맡기셨다. 배신할 자임을 아시면서 함께 지내셨다. 자신을 팔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양육하셨다. 원수와 함께 지내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배신자가 가룟 유다인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던 것 처럼 오히려 가룟 유다를 감싸셨다. 한편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시간 동안 분명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들을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 않는다.

사탄이 자신의 마음을 사로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배신할 자를 알고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기의 신념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했다.

*주님은 아셨다. 알면서도 사랑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다. 아무리 형식적으로 그렇게 보이려고 하여도 마음에서 부터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 티가 나는 법이다. 원수사랑은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탄에 매여 있는 이들은 배신의 사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지만, 주님의 영에 붙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랑은 배신할 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 기회를 줄 수 있다. 기다릴 수 있다. 주님께서 그러셨다.

*나도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원수인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알지 못할 지라도 자기 자신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을 알면서도 참으셨다.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요한이 분명하게 증언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요 13:1)”이라고 했다.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배신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용납이다.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기회를 열어 주는 언행이다. 유월절 준비 만찬의 뜻깊은 식사 자리에서 끝까지 기회를 주셨다. 그 자리에서 발을 씻겨 주시고 함께 식사 하셨다.



2.하지만 “괴로우셨다”(21절)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기에 주님은 괴로우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절)”

여기서 “괴롭다(타랏소)”라는 말의 의미는 “흔들리고 요동친다”라는 뜻이다. 어찌 가룟 유다만이겠는가? 제자들은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이 밤에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 자신을 팔아 넘길 가룟 유다뿐 아니라 불뿔히 흩어져 도망 가 버릴 지체들로 인해 괴로우셨다.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이 쳤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과, 가룟 유다와 함께 하셨다. 제자들은 그 순간 주님의 애타는 심정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을 끝까지 책임을 지셨다. 괴로워하며 감당하셨다.

*배신 당할 것을 아시면서 괴롭지만 묵묵히 감당하신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셨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주님이시다. 유다를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흔들리고 요동치는 배신 당함의 감정이 북받쳐 올라 올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주님은 가룟 유다 앞에서 결코 내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의 모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나의 삶도 역시 그래야 하는데….

*알면서도 속아주고, 배신 당하고, 자존감을 내려 놓아야 하는 자리가 목양의 자리이다. 매번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제껏 겪었던 일이니 괜찮을거야 싶지만, 쉽게 잊혀지지 못한다. 더구나 인간적인 배신을 당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 마음의 상처에서 오는 자존감 하락, 자신감 결여 등의 부수적인 폐해는 쉽사리 치유되지 못한다. 늘 괴롭다.

*그런데 이렇게 “알면서도 태연하게 당해 주는” 주님의 모습이 더 안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동기는 주님의 감정이 아니었다.



3.기록된 대로 이루기 위해, 주님을 믿게 하기 위해(18-19절)
인간적인 긍휼과 연민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당해 주지 않으셨다. 주님은 메시아의 사역에서 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응하게 하기 위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의 과정을 세밀하게 조정 하셨다.

“나는 너희 모두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b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b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나와 함께 빵을 먹은 자가’. 시 35:19; 69:4_새번역_18절).”

시편에서 예언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떡 한 조각을 적셔 가룟 유다에게 준 것이다. 또, 배신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말해 놓는 것은 배신이 일어날 때 제자들이 “내가 곧 나(내가 그) 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9절). 즉,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려고 미리 알려 주신 것이다.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주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려고 주님은 알아챌 수도, 포기하지도 않을 제자들과 가룟유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고 듣고 깨달아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의 구원의 사역은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온전하고 순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4.빛을 비추어 주셨지만, 밤(어둠) 속으로(30절)
주님은 가룟 유다가 주님의 기회에 반응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떡 한 조각을 적셔 건넨다고 미리 말씀하여 주실 때가 마지막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게 훤히 알고 계시고, 말씀 대로 응하게 하려고 라고 말씀까지 하셔서 그의 배신을 알리신 것은 “더 이상 주님을 팔아 넘길 어둠 속에 거하지 말고 구원의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돌이킴의 빛 가운데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새번역_30절).”

*빛(기회) 비추어 주시기 위해 여러번 각성 시켜 주셔서 빛 가운데로 돌이켜 나올 기회를 주셨지만, 결국 사탄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도록 내버려 두어 “밤에” 나갔다. “빛 가운데 있다가 어둠을 항해 뛰쳐 나갔다.”

*왜 그랬을까? 미리 알려 주시는 말씀의 기록된 경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간과하고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왜 어둠이 깃들까? “빛 되신 말씀(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음을 온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밤으로 뛰쳐 나간다. 어둠움 가운데 머문다.

*다윗의 노래가 새삼스럽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 이니이다(시 119:105)”



나는?
-결국 3년 동안이나 충실하게(?) 주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들었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말씀 따라 살지 못했다. 말씀을 온전히 붙잡지 못했다. 이런 가룟 다유다는 결국 빛을 도망쳐 어둠 가운데로 뛰쳐 나갔다.

-내가 지금 아무리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도 겉으로 보기에 주님 안에 거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면(믿지 않으면), 그 등불은 기름 떨어진 등일 뿐이다. 빛을 밝히지 못한다. 어둠을 찾아 다시 뛰쳐 나갈 수 있다.

-주님께서 무수한 기회를 주셨지만 밤에(밤으로) 뛰쳐 나간 가룟 유다처럼 말이다.

-말씀이 내 삶의 빛이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 어둠을 쫓아 뒤쳐 나가지 않는다. 말씀의 빛 가운데 걸어간다.

-주님은 유다를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배신 당할 것을 아시고 여러번 돌이킴의 기회를 주시면서 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마침내 배반을 결심한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의 이름을 다른 제자들에게 밝히지 않으시면서까지 마지막까지 돌이키기를 기대하셨다. 주님의 사랑은 이런 “끝까지 사랑”이다.

-아… 어떻게 주님의 이런 “끝까지 사랑”을 흉내낼 수 있을까? 감히 따라갈 수 있을까?


*주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따라 감히 흉내 내보도록 담대함을 주십시오.
*주님, 말씀이신 주님께서 나의 삶을 빛 가운데 살게 함을 믿습니다. 말씀 꼭 붙잡고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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