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발람의 길을 막고 선 여호와의 사자 [민 22:21-35]
 – 2023년 05월 04일
– 2023년 05월 04일 –
고대근동 지역에서는 당나귀를 “완고한 짐승”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보고 말하는” 당나귀였다. 완고한 당나귀는 세 번에 걸쳐 보고, 세 번에 걸쳐 말하지만,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발람은 전혀 보지 못했고, 자신이 가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세 번에 걸친 당나귀의 보고 말함은 이후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세 번에 걸쳐 보고, 세 번에 걸쳐 축복하게 될 것을 예표 한다. 성경에서 짐승이 말하는 경우는 두 번 나온다. 에덴 동산에서 뱀이 말했고 본문에서 당나귀가 말을 한다. 보고 말하는 나귀의 모습은 발람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용한 주술가로 알려진 발람은 보지 못하는데, 정작 당나귀는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피하였기 때문이다.
 
 
 
1.당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다(21-27절)
하나님께서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가서 선포하도록 허락하셨다. 발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 나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 가라고 허락하셨는데 갑자기 화를 내시는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32절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새번역은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이기에 너를 막으려고 이렇게 왔다”고 했다.
 
발람이 출발한 길은 “사악한 길, 가서는 안 될 길”이었다. 이를 막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칼을 들고 선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하였다. 정작 발람은 보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주술사인 발람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당나귀는 “세 번” 길을 막고 선 여호와의 사자를 피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자 급히 원래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 밭(들판)으로 갔다(23절). 24절에서 포도밭을 언급하므로 포도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발람은 말을 듣지 않는 나귀를 때렸다. 그러나 나귀는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을 막은 여호와의 사자와 마주 섰다(24절).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설 수 없다. 그래서 나귀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몸을 담벼락에 밀착했다. 이 과정에서 발람의 발이 담 사이 벽에 끼어 상처를 입는다(25절). 역시 발람은 나귀를 세차게 때린다. 그런데도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좌우로 피할 수 없는 좁은 곳에 선 관계로(26절) 발람 밑에 엎드리고 만다. 이에 발람은 노하여 채찍이 아니라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린다(27절). 나귀는 세 번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나, 발람은 세 번 보지 못한다. 나귀는 세 번 피했지만, 발람은 세 번 채찍질 했다. 너무도 노한 발람은 손에 칼이 있었다면 나귀를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29절)
 
 
 
2.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다(28-30절)
이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주신다. 나귀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구강 구조나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는 말을 하고 더 놀라운 것은 발람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말을 받아 대화를 이어간다.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마음과 뜻을 전달하실 수 있다. 그러다면 발람이라는 악한 이방인 주술사의 입술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을 전달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와 발람의 대화를 통해 자기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에 눈이 가린 발람의 영적인 안목을 열어 주심으로 그가 가려는 길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악한 길임을 보여주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욕심에 취해 있는 발람의 가는 길을 잠시 허락하신 것이다.
 
*또 보고 말하는 나귀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말해야 할 발람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시며 경고하신다. 발람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 번 바라 보고,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하게 된다.
 
 
 
3.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31-35절)
여호와께서 바람의 눈을 밝혀 주신다. 그의 눈에 칼을 빼들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다. 여호와의 사자를 발람을 책망한다. 책망한 내용은 나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반복이다. 발람은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나귀라고 생각하고 나귀를 세 번에 걸쳐 쳤으나 결국 자신을 막아 세운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또 본문은 발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 이유도 밝혀진다. “발람이 사악하기 때문이었다”(32절) 그런데 나귀가 발람을 막아 세운 것은 발람의 생명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대의 주술가로 알려진 발람이 자신의 나귀보다 못함이 드러난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고 발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발람은 즉시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34절)” 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하게 발람에게 전한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35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도록 허락했을 때 말과 동일하다(20절).
 
*그렇다면 나귀가 보고 말한 사건의 목적은 더욱 분명해 진다. 하나님은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가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람이 탐욕에 문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경계하고 다짐하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려는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갈 의지를 보이신다.
 
*적어도 이 순간의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그 뜻을 온전히 선포하기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도구였다.
 
 
 
나는?
–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열 일하시는 모습이 선명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일하신다. 첫 대면에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발락에게 가지고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 하셨다. 그들은 축복받은 민족이라고도 하셨다(12절).” 그런데 20절에서는 일어나 함께 가되 여호와께서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 하신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길을 나서는 발람을 항해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모습이 이랬다 저랬다 헷갈린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
 
-이것은 발람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일관되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두 번째 대면에서 “가라”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발람은 이미 복채와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한 유혹에 마음이 흔들렸다. 복채에 대한 탐욕과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찾아온 고관들을 유숙하게 하면서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발람은 이미 두 마음을 품고 이미 대면하여 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발람을 향하여 그럼 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정말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발람을 향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혹은 가려면 가라”라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렇기에 “가라”하신 명령은 정말 가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지만 이방인 주술사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더 우습다. 그러므로 다음날 아침 나귀에 안장을 채우고 길을 나서는 발람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는 “그가 감으로(23절)” 진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발람의 길을 막으시려고 그 앞에 여호와의 사자를 서게 하신 것이다.
 
*발람의 이런 행동은 뻔히 하나님의 의도를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다들 바 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으시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과 발람의 길을 막아서고 더 나아가 그들을 통해 오히려 축복을 선포하게 하신다. 명백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있음에도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관철되기를 바라다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자기 편리함으로 듣고 해석하여 자기의 해석과 뜻에 즉각 순종하려는 모습이 바로 발람의 모습이다. 이와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지 모른다.
 
 
-또 발람이 탄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선 것을 보고 포도밭으로 들어가고, 포도밭 사이 좁은 길을 막아서자 나귀가 담에 바짝붙어 발람의 발을 짖누르고, 급기야 좌우로 더이상 피할 곳이 없는 곳을 막아서니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주저앉고 만다. 이 과정에서 발람은 채찍질과 자기 지팡이로 나귀에게 매질을 했다.
 
-이른 아침 나선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기에, 철 없이 가라고 한다고 곧바로 일어난 발람을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죽일 수 있었지만 기회를 주기 위해 막아서기만 했다. 그럼에도 발람은 나귀가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애꿎은 나귀만 매질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영적인 민감함을 발휘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는 것이 일어난 상황에 분노하며 반응하는 것 보다 먼저여야 한다. 이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길러야 한다. 발람은 당대의 주술가였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영적인 일을하는 존재였지만 나귀도 보고 깨닫는 일을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발람의 모습은 출애굽 1세대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하심으로 출애굽하고 과야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여 주심을 경험했으며, 눈으로도 확연히 보아 왔던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들을 보았음에도 그 앞에서 광야의 불편한 환경으로 인해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럴때마다 기회를 주시며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자기들이 원하는 마음을 따라 살다 결국 광야에서 죽어갔다.
 
*나의 삶을 어떠해야 할까? 기록된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의 마음의 욕심을 먼저 구하는 모습이 발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를 잘 분별하여 발람의 길이 나의 삶에서 재연되지 않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행동을 보면서 깨닫지 못하는 발람에게 나귀의 입을 열어 듣게 하신다. 왜 세 번이나 때리는지, 발람이 자기를 타면서 언제 이렇게 행동한 적이 있었는지 말하는 나귀에게 발람은 자기의 손에 칼이 있었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귀가 이전에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주춤하며 때리는 것을 멈췄다.
 
-하나님께서는 평소같지 않는 나귀의 행동을 세 번이나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 발람에게 나귀의 입을 여셔서 깨우치고 계신다. 그러나 발람은 깨닫지 못한다. 결국 발람의 눈을 뜨게 하셔서 길을 막아서 있는 손에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그 사자가 자신이 채찍질 하고 때린 나귀가 아니었다면 발람은 벌써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발람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패역을 오래 참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며 가나안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내야 할 오늘의 교회들이 여전이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는 것을 오래 참으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을 발람의 길을 막아선 모습으로 일깨우신다. 그 사랑이 크고 크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한량없는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진즉 사망 선고가 내려진 채 영원한 형벌로 내달을 인생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망의 길으로 치닫는 나를 막아서고 일깨워 주셔서 구원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주님의 일하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은혜이다.
 
 
 
*주님, 발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것을 통해 민감하게 주님의 마음을 찾겠습니다. 나의 마음으로만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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