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발람의 두 번째 신탁(예언) [민 23:13-26]
 – 2023년 05월 06일
– 2023년 05월 06일 –
발락은 포기하지 않는다. 발람이 축복을 선포 했음에도 장소를 옮겨 저주 신탁을 시도한다. 발락이 생각했을 때 발람을 데리고 간 첫 번째 장소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 듯 하다. 이번에는 “달리 볼 곳(13절)”으로 이끄는데, 이스라엘 진영의 끝만 보이는 곳이었다. 아마도 발락은 이스라엘 진영의 전체가 보였던 첫 번째 장소가 발람의 선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신탁의 내용이 보이는 것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참으로 어리석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발락의 의도는 그가 발람을 인도하여 간 두 번째 장소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곳은 소빔 들 비스가 산 꼭대기이었는데, 흥미롭게도 모세가 비스가 지역 느보 산에 올라와서 죽는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진영의 끝자락만 보일 뿐이었다. 산악 지형으로 인해 소빔 들의 이스라엘 진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의 이런 바램과 달리 두 번째 신탁에서도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한다. 발락의 불평은 끝날 줄 모른다.
 
 
 
1.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두 번째 신탁(13-17절)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은 발람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전체를(개역 개정은 진영의  끝까지_22:41)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인도한 장소는 “그들을 달리 볼 곳… 그들의 끝만(13절)”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소빔 들의 비스가 산 꼭대기였다(14절). 이곳에 첫 번째 신탁할 때와 동일하게 일곱 제단을 쌓고 일곱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린다. 발람은 제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다.
 
발락은 넉넉한 복채와 인위적인 환경 조작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왕이었다. 그가 소빔 들을 선택한 이유는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13절)”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발락은 “오직 끝만” 보이는 장소를 찾아 저주 신탁을 이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스라엘 진영을 더 적게 보여 주어 저주를 선포하는게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의도 했을 것이다.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의 실체를 되도록 감추려고 한 것이다. 
 
발람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신탁을 받기 위해 첫 번째 신에서 행한 절차와 유사하게 진행한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다. 발락은 발람이 여호와께 드린 제단과 제물 곁에서 신하들과 함께 기다렸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인 그모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을터인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저주를 구한다. 여호와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여호와’를 외친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2.발람의 두 번째 예언(18-24절)
이렇게 간절히(?) 저주를 원한 발락의 바램과 달리 발람이 선포한 내용은 첫 번째 선포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먼저,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실수하거나 변함이 없으시다고 선포한다. 이는 발락이 첫 번째 축복을 듣고서도 두 번째에는 바꾸어 보려고 시도한 것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여러가지 이유와 상황에 따라 처음 정한 것을 수시로 바꾼다. 이에 따라 하나님도 장소와 여건을 바꾸면 신탁의 내용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발락의 천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꼬집은 것이다.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언제나 진실하시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후회하심도 없다. 그러므로 말씀 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19절). 이는 발락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한들 하나님의 마음은 바꾸게 할 수 없다는 선포이다. 또한 발람이 첫 번째 예언을 축복으로 받았기에 두 번째도 축복의 말씀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20절).
 
둘째,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광야 생활 가운데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성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기에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심판의 대상이 출애굽 1세대였고 지금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백성들은 출애굽 2세대이기에 11-19장까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심판의 역사가 계속되었지만 이들은 20장에서 모두 죽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현재의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구체적인 죄악이 드러나 있지 않는다. 또 모압의 시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견디고 여기까지 온 민족이다. 그들이 보았을 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맞다. 이방인인 발람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할 만큼 죄악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셋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이 단어는 분사형이다. 즉, 과거에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뿐 아니라 지금도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의미다.  이는 권능의 손이 함께 하기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을(야곱, 이스라엘) 해할 점술이 없고 복술도 없다(22-23절). 이는 아무리 유명한 발람의 점술이나 복술이라도 “들소의 뿔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요구하고 있는 저주가 무위에 그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23절 하)”라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 감탄은 마치 “암사자와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 결코 눕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24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반드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3.발락의 불평(25-26절)
발락은 다시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이나 저주를 요청했지만, 발람의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첫 번째 축복이 이스라엘의 독특성과 번성을 강조했다면,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가나안 땅 정복까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발락은 당황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저주가 아니므로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외친다(25절).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발람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만 전할 뿐이라고 대꾸한다(26절). 그런데 이 말은 발람의 진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여전히 발락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말할 뿐이었다. “무엇이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다고, 내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새번역_26절). 발람의 말에도 짜증이 깊이 묻어 있다.
 
 
 
나는?
-발락의 무지함이 내 마음에 다가온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이 막히고 어려우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겠지만 그보다 나의 마음에 간절한 바램대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에 발락처럼 포기하지 않고 반복할 수 있겠다. 그래서 좀 민망하다. 이방인이 하는 행동인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이… 좀 부끄럽다. 이러지 말아야지….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생각과 태도를 진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으신다. 그런데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기준이 변할 리 없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더 정확히 알고 나의 유익과 고집을 내려 놓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이 아닐까?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 중에 “이미 주신 응답은 외면하고 내가 바라는 것만 기다리기 때문이 아닐까? 발락의 모습처럼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받을 수 있을까?” 라는 태도로 하나님께 구하지는 않는가?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또 받았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기만 할 뿐이다. 오히려 자기도 발락의 요청을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복의 예언을 하는 것이 답답한가 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술로 전하여도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삶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발람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발람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변치 않고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충분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는 것 보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진실하고 신실하게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다. 나는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고 있는가? 매 순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주님, 좀 부끄럽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다 이미 응답하신 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민망합니다.
*주님,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은혜와 능력이 오늘 저에게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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