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입다의 등장 [삿 11:1-11]
 – 2021년 11월 24일
– 2021년 11월 24일 –

10:18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 선봉으로 설 자를 찾는 장면에서 갑자기 입다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여덟번 째 사사인 입다는 ‘큰 용사’, ‘기생이 낳은 아들’, ‘잡류(건달류)들의 우두머리’ 등으로 그를 소개할 수 있겠다. 큰 용사였지만 기생의 아들이어서 기업을 잇지 못하도록 그의 이복 형제들에게 쫓김을 당해 “놉 땅”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시간이 흘러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 올 때(10:18) 길르앗 사람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할 정도 강성한 무리를 가지고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를 세우는데 모두 동의할 정도였다. “큰 용사(힘의 용사)”로 소개한 것은 기드온에게 천사가 불러준 용어와 같다(6:12). 그는 누가 봐도 탁월한 용사였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입다의 당시 사회(관습)적 시선에 있어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고, 이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의 자격을 운운하며 쫓김을 당했다. 그리고 ‘잡류(건달류)’들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의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 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 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는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으로 입다에게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것을 말하면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한다고 찾아 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 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이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만약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자신을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의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 보다, 자신과는 상관 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 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그의 마음에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인해 “명예롭게” 귀향 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 하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을 직면하러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가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대화) 그가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 했다는 것이다. 추방 당하고 이방의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 받은 경험은 그의 삶을 이처럼 치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은 “암몬족속과의 전쟁 계획”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 전에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치밀하게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이 없는 억지인지를 조목 조목 전달한다.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 참 희한하다. 암목의 압제 18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하며 배수의 진을 치며 매달렸는데, 암몬 족속이 쳐들어 오자 그렇게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이런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 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이력,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추방 시킨 것은 상관 없었다. 그의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는 모습들이다.

-일단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의 경우 본처의 형제들에게 추방 당한 것이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어서였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 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같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 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안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진 것이다.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주님, 무엇보다,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가 후진적인 공동체가 아니길 빕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수준 높은 공동체임을 증명하는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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