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불안한 평화… [삿 12:1-15]
 – 2021년 11월 27일
– 2021년 11월 27일 –

암몬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동족과의 전쟁이 뜻하지 않게 발발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또다시 교만하게 시기와 질투를 부린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며 요단강을 건너와 협박했다. “….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새번역_1절).” 이 황당한 작태 앞에 입다는 단호하게 반응한다. 암몬과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요청 했지만 응하지 않은 점과(2절), 자신과 길르앗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워 이겼는데 어찌하여 전리품을 나누자고 하는가 반문한다(3절).

말로만 반박하지 않고 위협하러 올라온 그들의 모습을 명분삼아 길르앗 사람들과 함께 에브라임을 무찔러 버렸다.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시 당했던(4절) 울분까지 터져서 파죽지세로 에브라임을 평정해 버렸다.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한 에브라임 지파들의 퇴로인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건너려는 자들에게 “쓉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렇게 잡아 죽인 사람이 4만 2천명이나 되었다(6절).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스라엘은 길르앗의 입다 이후 베들레헴의 입산과 스불론의 엘론, 비라돈 사람 압돈이 각각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다.


1.에브라임 지파의 오만함(1절)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 전에 온 지파에 공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었다(2절). 하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다가 의외의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우뚝 서자 시기가 발동했다. 이전에 기드온에게도 에브라임은 “네가 전쟁하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8:1-2)”고 윽박 질렀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을 치켜 세움으로 분노를 삭게 했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매우 잘 통찰하고 있었다. 기드온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입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파병도 하지 않았으면서 전리품을 달라는 억지를 주장하면서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1절)”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더구나 입다는 자신의 딸을 인신제사로 바친 상황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민족들 앞에서, 더구나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따른 비극을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부린 오만한 추태에 대하여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신 것을 “어찌하여” 오늘(에야) 내게(이곳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며 분노한다.


2.입다의 결행(5-6절)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그는 “큰 용사(힘의 용사)”였다. 기드온처럼 치켜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르앗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평소에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에 속한 자들”이라며 무시 받았던 울분을 더해 싸워 무찔러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유일한 퇴로인 “요단강 나루턱”을 선점하여 강을 건너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유의 발음을 확인하며 가려내어 그 자리에서 처형해 버린다. 그 수가 4만 2천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가장 기름진 땅을 분배 받고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에브라임 지파는 괴멸 되다시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월감에서 오는 교만과 욕심에 눈이 먼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3.평화가 이어지지만(8-15절)
사사 입다의 시대 포함 31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지속된다. 암몬을 물리친 입다 이후 가나안 민족들의 침략이 없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사사들의 면면은 참담하다.

입산은 기드온의 전철을 따른 것처럼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다. 그런데, 특히 결혼에 있어 딸들을 “밖으로(개역 개정)” 시집을 보냈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개역 개정)” 여자 30명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한다(9절). 개역 한글 번역은 이 “밖에서(후츠)”를 “타국에서”로, 새번역은 “다른”으로 번역했다. 기본 의미는 “외부, 바깥쪽”이지만 신 25:5과 삿 12:9에서는 “후츠”라는 단어를 친족, 동족이 아닌 “타인”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사사 입산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들과 결혼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고 있다.

엘론은 별다른 언급없이 스불론 사람이라는 기록만 남긴다. 가장 연약한 지파중에서 나온 사사였다. 그를 뒤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다. ‘비라돈’이라는 지명이 두번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아말렉 사람의 산지라는 설명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압돈은 아말렉 남자와 에브라임 지파 여인 사이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압돈도 이방결혼의 열매였다. 압돈에게도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이나 되었고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

*평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리어 사사들의 모습은 여지없이 연약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다른 이방 민족들의 왕들처럼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들을 많이 낳았다. 향락에 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방 결혼을 서슴치 않았다. 솔로몬 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평화임에 틀림없다. 또한 사치도 문제다. 아들과 손자들에게 ‘어린 나귀’를 태울 정도로 재물이 넘쳐났다. 더구나 가나안 족속과의 사이에서 난 이도 사사가 되었다.

*지도자가 향락을 탐닉하고, 적극적인 이방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걸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까지 어린 나귀를 타게 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다는 인신제사, 입산은 축첩과 이방결혼, 압돈은 사치와 지나친 부를 지닌 사사 였다. 이들이 다스린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평화가 진정 평안일까? 그저 일시적인 “평온”이 아닐까?

*기드온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입다는 인신제사 서원을 이행하여 딸을 죽였으며, 입산은 여러 부인들에게서 자녀 60명을 낳았다. 이 자녀들을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과 결혼 시켰다. 솔로몬의 외교정책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른다. 또한 압돈은 사치와 부를 누린 부자였다. 이스라엘은 이들 사사로 활동한 31년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영적으로는 날개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추락하고 쇠망하고 있음에도 겉으로 평화롭다 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평화롭기에 음욕대로 살고, 부를 축재하여 사치하며,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을 평화의 수단으로 사용 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당황스럽다. 평화로운 시대인데, 불안한 평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듯한 마음도 든다.

*지도자가 이렇게 형편 없음에도 평화는 지속되었다. 이럴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심으로 살아낼 때 누리는 평화와 다른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요셉 지파에 속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은 자파를 형성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각각 지파를 이루었다. 에브라임이 아우였지만 형보다 나았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에 가장 유럭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한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모두 요단강 양쪽의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당시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마땅히 실천해야 할 힘이 있는 명문 지파였다.

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쉽게 딴지를 거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거들먹 거리는 것이다. 교만하기 짝이 없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힘을 알기에 자세를 낮추며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입다은 달랐다. 에브라임의 딴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더 나아가 암몬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의 사사 됨은 하나님에 의한 것 이기에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잘못 건든 것이다.


*한편으로 입다의 감정에 앞선 결행이 아쉽기만 하다. 같은 민족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사사로 세움을 받아서 평화로운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사사가 입다가 되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전으로 인해 그의 사사로서의 통치는 어수선 하기만 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입다의 분노를 보면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순간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나의 성급함에서 오는 분노를 읽게 된다. 나도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입다의 분노에 찬 내전은 아쉽기만 하다.

*입다를 묵상하면서 일상의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에브라임의 근거없는 비방에 화가 날테지만 내전으로 비화되어 4만 2천명의 장정을 죽였다는 것은 학살과 다름 없다. 요단 나루턱에서 지역 방언을 도구로 일일히 확인하며 처단했다는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학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잔인한 학살이 이어진다. 순간의 분노를 절제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사사시대가 혼란의 시대인 것은 확실하다. 말씀을 알아 가는 데 게을러서 멀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에브라임의 모습이나 입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투영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사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말씀에 관심없고 말씀 따라 살아가는 것에 게으른 시대인 것만 틀림 없기에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더구나 입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은 반전을 만들지 못했다. 도리어 사사로서의 정체성도 잃어버릴 정도로 삶이 혼탁해 졌다.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이나, 부를 축재하여 사치 하며 사는 것이나, 이방 결혼을 통해 눈에 보이는 평화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나…말씀에서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 예들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세워 나가야 함에도 말씀을 떠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면서 사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나의 사역의 자리가 이와 같이 참담하게 되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더욱 중심을 지켜야 하겠다!

*말씀에서 떠나 있지만 세상에 구현 되는 평화… 겉으로는 평화 이지만 이미 썩어 가는 소망 없는 평화여서 괴롭다. 썩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삶을 말씀으로 정비하지 않는 지도자가 아쉽다. 하기야 평화로운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더 어렵지… 불안 불안한 평화가 30여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숭배의 길에 미끄러질 것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이다…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겉으로는 평화로운데 말씀을 지키는 평화가 아니다. 불안한 평화가 사람들의 영적 무장도 해제 시켜 버린다.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뜻을 노골적으로 불순종하며 분명히 금한 명령을 어기며 “불안한 평화”를 이어간다.


**주님, 에브라임의 교만, 입다의 분노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매사에 분노로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되새기며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추구하며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지도자로서 시대적 소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본이 되는 삶과 지도력을 추구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스데반의 설교_모세 이야기 [행 7:17-36]

스데반은 출애굽의 이야기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모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청년 시절 애굽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2차 투옥과 하나님의 적극 개입 [행 5:12-26]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 이에 시기로 가득한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다시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