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이의 언어 생활은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이들(의인들)을 어떻게 돌보실까?
1.지혜로운 이들의 언어 생활(18-21, 31-32절)
입술(입,혀_18, 19, 20, 21, 31, 32)가 6회 등장한다.역시 “언어생활”에 대한 지혜의 가르침이다.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거짓된 입술과 중상하는 미련함(18절), 입술을 제어하는 것이 “지혜”(19절), 의인의 말의 가치와 비교되는 악인의 마음의 가치(20절), 여러 사람을 교육하는 의인의 입술(21절), 지혜를 내는 입 베임을 당할 패역한 혀(31절), 기쁨을 말하는 입술 패역을 말하는 악인의 입(32절)으로 각각 표현하였다.
언어생활의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솔로몬은 화려한 언변보다 ‘절제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9절). 무수한 말 잔치는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지혜로움은 입술을 제어하는 “절제”에서 나온다. 단지 입술만일까? 마음이 문제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려해도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지혜다. 마음에서 이미 내가 내뱉는 언어가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다. 세상이 즐겨듣고 싶은 무수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려 주시는 한 마디 말을 위해 “말 욕심”을 참아야지…
이렇게 절제된 언어는 가치가 있다. “순수한 은과 같고(20절),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린다(새번역_21절)” 하나님의 언어로 말하기 위해 세상의 언어를 절제하면, 적은 말이라도 가치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살린다. 특히 나와 같은 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
이것 뿐일까? 아니다!. 세상이 익숙하고 즐겨하는 말은 절제하고 내 마음속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치 있는 말을 할 때, 그 말은 삶을 이끄는 지혜가 되고(31절), 사람들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에(32절) 충분하다. 사람이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 언어에서 이런 지혜로움이 묻어 나기를 소망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해야 할 말을 담담하게 말하는 언어이기를 바란다.
*가끔 나도 내가 한 말에 감동 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전혀 의도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았는데, 생각나서 하게 되는 말이다.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현장에서 이런 경험은 자주 일어난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어 아니겠는가! 그 언어는 말씀의 영향력을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아서 어떤이에게는 삶의 지표가, 어떤 이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어떤 이에게는 회복하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이 꼭 필요한 때, 필요한 이들 앞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하도록 나의 입술을 사용하실 줄 믿는다. 이 말이 나를 살리고 나의 입술을 통해 듣는 이들을 살릴 줄 믿는다.
*주님, 세상의 말을 생각 없이 즐기는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세상 말은 제어하고 하나님의 말은 거침 없게 하소서…
2.지혜로운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22-30절)
또한 하나님께서 의인을 돌보심을 강조한다(22-30절).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22절에서는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표준새번역)” 부유함으로 선언하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24절에서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부유함은 지혜로운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물, 섭리, 역사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지혜를 따라 사는 의인들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 의인들을 “입술을 제어하는 자(19절), 경외하여 장수하는 자(27절), 소망이 이루어지는 즐거움이 있는 자(28절),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지혜의 입술을 가진 사람(31-32절)”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아무 말을 내뱉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말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들은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반면 악인들은 망한다. 아무리 악인들이 현재를 장악하고 득세하여도 의인은 하나님으로 인해 결국 이긴다. 악인들의 횡포와 성공에 답답하고 불공평, 불공정을 심각하게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 “정직”함을 버리고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동참하는 이들이 보인다. 세상과 하나님 백성의 구분이 모호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의 의로움을 지키고 정직하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_22절)”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주님 안에서 얻게 되고 누리는 부유함으로 인해 근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게 된 재물이 가져오는 근심은 상당하다. 손으로 꽉 움켜 잡기 위해 발버둥칠 수록 마음의 근심과 공허함은 쌓여만 간다. 정직하고 공의롭게 얻은 것이 아닌 재물일 수록 더하다. 하지만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공정하게 삶의 수고로 얻은 재물은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열매임을 알기에 당당하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얻은 수고의 열매이기에 기쁘게 수확을 거둔다.
*지혜로운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런 “누림”이다. 기뻐할 때 기쁨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걸어온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안다. 그 믿음의 확신 속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악인은 이러한 삶의 기쁨(낙)을 누리지 못한다. “두려워 한다(24절)”, “회오리바람에 모든 것이 없어진다(25절)”,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존재다(26절)”, “수명이 짧다(27절)”, “희망이 끊어진다(28절)”, “멸망이 기다리고, 땅에서 배겨내지 못한다(29-30절)”, “잘려버릴 거짓된 혀로 거짓만 말한다(31-32절)” 언제 없어질지 불안해 하며,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남발하며 간신히 삶을 유지하지만, 반드시 멸망 당하는 것이 악인의 삶이다.
*악인은 하나님과도, 사람들과도 단절되고 끊어지는 종말이 기다린다. “끊어짐” 그 종말을 향해 내달리나,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악인은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다.
3.하나님의 돌보심을 누리려면?(23절)
그렇다면 삶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누리는 지혜로운 의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솔로몬이 주는 정보는 이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서 낙을 누리지만, 명철한 사람은 지혜에서 낙을 누린다.(새번역_23절)”
지혜에서 낙을 누리라!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반복 강조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 안에서 낙(기쁨)을 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의 언어는 기쁨의 언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의 일상은 기쁨의 일상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다. 하지만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서 낙을 누리는 미련한 사람(악인)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늘 두려워 한다. 급기야 그가 두려워 하는 일이 그를 덮친다. 순식간에 그의 삶의 기초가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삶의 운명을 정하신 것을 깨달았다면,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낙(기쁨) 보다 지혜(말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낙을 누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금 대다수가 즐기는 세상의 낙이 너무나 달콤하다. 쾌락을 쫓는 삶이 당연하다. 내가 돈벌고, 성공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여긴다. 그래야 산다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즐기는 낙은 별반 다르지 않다. 술, 향락, 성적 타락을 즐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려고 덤빈다. 이 사회에서 향응을 접대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세상의 낙은 그것이 그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진리에서 기쁨을 누린다? 세상의 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미련스럽게만 여겨지는 답답한 삶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낙을 누리는 지혜가 결국 영원한 생명을 결정한다. 죄악과 함께 낙을 누리는 삶의 결국은 멸망이지만, 잠시 사는 세상의 낙을 절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외함 안에서 그의 돌보심 안에서 소소하게 살다, 영원한 구원의 낙(기쁨)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다.
어떻게 지혜 안에서 낙을 누릴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말씀 묵상이다. 나에게도 번아웃이라는 것이 찾아 왔었다.(앞으로도 올 수 있겠지?) 이런 저런 무수한 방법을 시도하거나, 때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영적 침체 속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발버둥을 쳤다.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근근히 이어오던 말씀 묵상이 침체의 흑암 속에 비춰지는 한줄기 빛이었다. 때로는 가느다랗게, 때로는 확연하고 선명하게 비추는 빛에 전율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이 일어날 때면 어떤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었다.
유명한 설교를 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베스트셀러를 읽어도 그때 뿐이었다. 순간의 감흥은 일어났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일 뿐이었다. 하지만 말씀 묵상은 달랐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말씀은 정직하게 침체 속에 있는 나를 보게 했다. 나의 마음을 발가 벗겼다. 나의 생각을 들춰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자아의 추한 민낯이 여지없이 까발려 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오히려 나의 내면을 회복 시키는 은혜의 요소들이 되었다. 그런 깨달음들이 내 마음과 몸에 잔뜩 끼여 있는 허세들을 부수었다. 유명해지고 싶고, 설교 잘하고 싶은 욕망보다 초야에 묻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만 한다는 깨달음으로 대체되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가는 것을 묵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하여 주시는 지혜가 무엇보다 기뻤다. 그 기쁨은 에너지가 되어서 내 삶을 지탱하게 하였다. 말도 안되는 사역의 현장에서 오롯히 견디게 하였고 그 인내의 열매가 생각지도 못하고 계획하지도 않았던 지금의 모습이다. 이것이 지혜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지혜로 낙을 삼는 것이 아니겠나!
나는?
-여전히 부족함을 깨우치는 영역이 바로 “말”이다. 수려한 설교언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탁월한 대화의 기술도 아니다. 성도들과 만날 때 일상의 언어… 아내와 아이들과 일상의 언어 속에 있어야 할 지혜다.
-솔로몬은 언어의 지혜를 “절제”에 두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많으면 “수다”가 된다. 과유불급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옳은 말이 넘쳐나면 그 말은 살리는 말이 아니라 피하는 말이 된다. 나에게 필요한 언어의 지혜는 “해 주고 싶은 말의 풍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려 주고 싶은 절제된 한 마디”일 것이다.
-하나님이 들려 주고 싶은 말을 전달해야 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어”에 깊이 공감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의 입술에서 세상의 언어와 다름 없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 나오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삶의 기쁨을 그의 지혜에서 찾고 누리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다. 즉, 내가 먼저 하나님의 언어를 깨닫고 누려야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오늘도 묵상을 이어간다. 묵상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지혜의 기쁨을 먼저 누리고 알려 줘야지, 보여 줘야지… 무수한 말들의 잔치가 아니라 묵직한 한 마디, 울림 있는 행동으로 들려주고 보여 주어야지… 그것이 지혜를 낙으로 삼는 삶 아니겠나!
*주님, 나의 말은 제어하고 주님의 말은 주저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지혜(묵상)에서 누리는 낙(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부어 주소서.
1.지혜로운 이들의 언어 생활(18-21, 31-32절)
입술(입,혀_18, 19, 20, 21, 31, 32)가 6회 등장한다.역시 “언어생활”에 대한 지혜의 가르침이다.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거짓된 입술과 중상하는 미련함(18절), 입술을 제어하는 것이 “지혜”(19절), 의인의 말의 가치와 비교되는 악인의 마음의 가치(20절), 여러 사람을 교육하는 의인의 입술(21절), 지혜를 내는 입 베임을 당할 패역한 혀(31절), 기쁨을 말하는 입술 패역을 말하는 악인의 입(32절)으로 각각 표현하였다.
언어생활의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솔로몬은 화려한 언변보다 ‘절제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9절). 무수한 말 잔치는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지혜로움은 입술을 제어하는 “절제”에서 나온다. 단지 입술만일까? 마음이 문제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려해도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지혜다. 마음에서 이미 내가 내뱉는 언어가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다. 세상이 즐겨듣고 싶은 무수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려 주시는 한 마디 말을 위해 “말 욕심”을 참아야지…
이렇게 절제된 언어는 가치가 있다. “순수한 은과 같고(20절),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린다(새번역_21절)” 하나님의 언어로 말하기 위해 세상의 언어를 절제하면, 적은 말이라도 가치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살린다. 특히 나와 같은 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
이것 뿐일까? 아니다!. 세상이 익숙하고 즐겨하는 말은 절제하고 내 마음속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치 있는 말을 할 때, 그 말은 삶을 이끄는 지혜가 되고(31절), 사람들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에(32절) 충분하다. 사람이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 언어에서 이런 지혜로움이 묻어 나기를 소망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해야 할 말을 담담하게 말하는 언어이기를 바란다.
*가끔 나도 내가 한 말에 감동 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전혀 의도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았는데, 생각나서 하게 되는 말이다.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현장에서 이런 경험은 자주 일어난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어 아니겠는가! 그 언어는 말씀의 영향력을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아서 어떤이에게는 삶의 지표가, 어떤 이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어떤 이에게는 회복하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 말이 꼭 필요한 때, 필요한 이들 앞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하도록 나의 입술을 사용하실 줄 믿는다. 이 말이 나를 살리고 나의 입술을 통해 듣는 이들을 살릴 줄 믿는다.
*주님, 세상의 말을 생각 없이 즐기는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세상 말은 제어하고 하나님의 말은 거침 없게 하소서…
2.지혜로운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22-30절)
또한 하나님께서 의인을 돌보심을 강조한다(22-30절).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22절에서는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표준새번역)” 부유함으로 선언하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24절에서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부유함은 지혜로운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물, 섭리, 역사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지혜를 따라 사는 의인들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 의인들을 “입술을 제어하는 자(19절), 경외하여 장수하는 자(27절), 소망이 이루어지는 즐거움이 있는 자(28절),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지혜의 입술을 가진 사람(31-32절)”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아무 말을 내뱉는 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말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자들은 “입술을 제어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반면 악인들은 망한다. 아무리 악인들이 현재를 장악하고 득세하여도 의인은 하나님으로 인해 결국 이긴다. 악인들의 횡포와 성공에 답답하고 불공평, 불공정을 심각하게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 “정직”함을 버리고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동참하는 이들이 보인다. 세상과 하나님 백성의 구분이 모호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의 의로움을 지키고 정직하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_22절)”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주님 안에서 얻게 되고 누리는 부유함으로 인해 근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게 된 재물이 가져오는 근심은 상당하다. 손으로 꽉 움켜 잡기 위해 발버둥칠 수록 마음의 근심과 공허함은 쌓여만 간다. 정직하고 공의롭게 얻은 것이 아닌 재물일 수록 더하다. 하지만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공정하게 삶의 수고로 얻은 재물은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열매임을 알기에 당당하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얻은 수고의 열매이기에 기쁘게 수확을 거둔다.
*지혜로운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런 “누림”이다. 기뻐할 때 기쁨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걸어온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안다. 그 믿음의 확신 속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악인은 이러한 삶의 기쁨(낙)을 누리지 못한다. “두려워 한다(24절)”, “회오리바람에 모든 것이 없어진다(25절)”,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존재다(26절)”, “수명이 짧다(27절)”, “희망이 끊어진다(28절)”, “멸망이 기다리고, 땅에서 배겨내지 못한다(29-30절)”, “잘려버릴 거짓된 혀로 거짓만 말한다(31-32절)” 언제 없어질지 불안해 하며,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남발하며 간신히 삶을 유지하지만, 반드시 멸망 당하는 것이 악인의 삶이다.
*악인은 하나님과도, 사람들과도 단절되고 끊어지는 종말이 기다린다. “끊어짐” 그 종말을 향해 내달리나,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악인은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나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다.
3.하나님의 돌보심을 누리려면?(23절)
그렇다면 삶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누리는 지혜로운 의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솔로몬이 주는 정보는 이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서 낙을 누리지만, 명철한 사람은 지혜에서 낙을 누린다.(새번역_23절)”
지혜에서 낙을 누리라!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반복 강조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 안에서 낙(기쁨)을 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의 언어는 기쁨의 언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의 일상은 기쁨의 일상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다. 하지만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서 낙을 누리는 미련한 사람(악인)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늘 두려워 한다. 급기야 그가 두려워 하는 일이 그를 덮친다. 순식간에 그의 삶의 기초가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삶의 운명을 정하신 것을 깨달았다면,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낙(기쁨) 보다 지혜(말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낙을 누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금 대다수가 즐기는 세상의 낙이 너무나 달콤하다. 쾌락을 쫓는 삶이 당연하다. 내가 돈벌고, 성공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여긴다. 그래야 산다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즐기는 낙은 별반 다르지 않다. 술, 향락, 성적 타락을 즐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려고 덤빈다. 이 사회에서 향응을 접대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세상의 낙은 그것이 그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진리에서 기쁨을 누린다? 세상의 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미련스럽게만 여겨지는 답답한 삶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낙을 누리는 지혜가 결국 영원한 생명을 결정한다. 죄악과 함께 낙을 누리는 삶의 결국은 멸망이지만, 잠시 사는 세상의 낙을 절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외함 안에서 그의 돌보심 안에서 소소하게 살다, 영원한 구원의 낙(기쁨)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다.
어떻게 지혜 안에서 낙을 누릴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말씀 묵상이다. 나에게도 번아웃이라는 것이 찾아 왔었다.(앞으로도 올 수 있겠지?) 이런 저런 무수한 방법을 시도하거나, 때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영적 침체 속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발버둥을 쳤다.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근근히 이어오던 말씀 묵상이 침체의 흑암 속에 비춰지는 한줄기 빛이었다. 때로는 가느다랗게, 때로는 확연하고 선명하게 비추는 빛에 전율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이 일어날 때면 어떤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었다.
유명한 설교를 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베스트셀러를 읽어도 그때 뿐이었다. 순간의 감흥은 일어났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일 뿐이었다. 하지만 말씀 묵상은 달랐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말씀은 정직하게 침체 속에 있는 나를 보게 했다. 나의 마음을 발가 벗겼다. 나의 생각을 들춰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자아의 추한 민낯이 여지없이 까발려 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오히려 나의 내면을 회복 시키는 은혜의 요소들이 되었다. 그런 깨달음들이 내 마음과 몸에 잔뜩 끼여 있는 허세들을 부수었다. 유명해지고 싶고, 설교 잘하고 싶은 욕망보다 초야에 묻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만 한다는 깨달음으로 대체되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가는 것을 묵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하여 주시는 지혜가 무엇보다 기뻤다. 그 기쁨은 에너지가 되어서 내 삶을 지탱하게 하였다. 말도 안되는 사역의 현장에서 오롯히 견디게 하였고 그 인내의 열매가 생각지도 못하고 계획하지도 않았던 지금의 모습이다. 이것이 지혜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지혜로 낙을 삼는 것이 아니겠나!
나는?
-여전히 부족함을 깨우치는 영역이 바로 “말”이다. 수려한 설교언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탁월한 대화의 기술도 아니다. 성도들과 만날 때 일상의 언어… 아내와 아이들과 일상의 언어 속에 있어야 할 지혜다.
-솔로몬은 언어의 지혜를 “절제”에 두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많으면 “수다”가 된다. 과유불급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옳은 말이 넘쳐나면 그 말은 살리는 말이 아니라 피하는 말이 된다. 나에게 필요한 언어의 지혜는 “해 주고 싶은 말의 풍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려 주고 싶은 절제된 한 마디”일 것이다.
-하나님이 들려 주고 싶은 말을 전달해야 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어”에 깊이 공감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의 입술에서 세상의 언어와 다름 없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 나오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삶의 기쁨을 그의 지혜에서 찾고 누리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다. 즉, 내가 먼저 하나님의 언어를 깨닫고 누려야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오늘도 묵상을 이어간다. 묵상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지혜의 기쁨을 먼저 누리고 알려 줘야지, 보여 줘야지… 무수한 말들의 잔치가 아니라 묵직한 한 마디, 울림 있는 행동으로 들려주고 보여 주어야지… 그것이 지혜를 낙으로 삼는 삶 아니겠나!
*주님, 나의 말은 제어하고 주님의 말은 주저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지혜(묵상)에서 누리는 낙(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