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공평, 겸손, 정직, 공의롭게 사는 이)와 악인(사악한 자)의 다른 삶의 결말을 계속해서 다룬다(1-8절). 선명하게 그 결말이 다르다. 특히 이들이 이웃과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공동체의 위기와 이로움이 악인과 의인의 존재에 따라 갈린다(9-15절). 공동체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정직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정직하다(정의롭다)” 솔로몬이 말하는 정직은 무엇인가? 정직함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일까?
1.정직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1절)
“정직(야솨르)”의 의미는 “곧고 바르며 정당하다”는 뜻이다. “직진”이라는 뜻도 있고, “안과 밖이 같은 의로운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솔로몬은 이런 사전적인 의미보다 “정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먼저 깨우친다.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새번역_1절)” 정확하고 정직한 저울추… 구약 시대 장사꾼들중 일부는 모양은 같은데 무게가 다른 두 개의 무게추로 사람들을 속였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 하셨고(신 25:13, 15) 선지자들의 회개의 외침 속에서도 무게추를 속이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종종 등장한다(미 6:11). 잠언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중심 사역으로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그의 실제적인 종교개혁의 현장은 성전 보다 삶 이었음을 알수 있다. 특히나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왕하 18:3절)” 이다. “정직한 왕”이었다. 이런 그를 여호와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왕하 18:7)” 하게 하셨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건물인 성전 보수에 그치지 않는다.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올바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정직은 성전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행하는 것 이어야 했다.
*속이는 두 개의 저울추가 아니라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와 되를 지키면 “네 날이 길리라” 약속하셨다.(신 25:15)
2.정직은 겸손과 성실, 공의와 함께 한다(2-8절)
지혜는 겸손과 함께 한다(2절). 일상의 부요함의 통로는 “성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를 멸망 시키지 않으신다(3절). 일상을 든든하게 채우는 것은 “성실”이다. “공의(옳은 행실)”은 삶의 길을 곧게 한다. 악인은 자신의 공의롭지 못한 악 때문에 쓰러진다(5절). 곰곰히 생각해 보니 “태도”들이다. 지혜있는 자의 태도는 정직, 겸손, 성실, 공의가 어우러져 있다.
성실(투마)은 ‘완전한 상태, 무흠’이라는 의미가 있다. 정직과는 따로 갈 수 없는 속성이다. 성실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신실(아만)’은 “믿을 만한(faithful)”을 의미한다. 진실, 아멘과 의미가 통한다. 믿을만한 사람은 성실과 공의가 정직과 함께 어우러진 사람이다.
정직과 성실, 공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건짐을 받게 하지만, 불의로 모은 재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4절). 세상은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영원한 사망에 빠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하는 데서 오는 정직과 성실, 공의로운 삶의 태도, 즉 의로운 삶이다.
3.정직은 이웃과 공동체를 살린다(9-15절).
“하느님을 저버린 사람은 혀로 이웃을 죽이지만 착한 사람은 기도로 이웃을 살린다.(공동번역_9절)” 우연찮게 공동번역으로 본문을 살폈는데, 9절 말씀이 마음에 끌렸다. 하나님을 저버린 악인은 그 혀로 이웃을 죽인다. 하지만 의인은 기도(지식)으로 이웃을 살린다. 특히 개역본이나 새번역본은 ‘지식’으로 번역한 것을 ‘기도’로 번역하여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 “기도”임을 구체적으로 깨우친다.
11절의 공동번역도 “올바른 사람의 축복은 마을에 번영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의 말은 마을을 깨뜨린다.(공동번역)” 라고 했다. 마을을 깨뜨리는 것이 “말”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모욕(멸시)와 잠잠함의 이미지로, 13절도 “남의 비밀을 숨겨주는” 신실한 자(마음이 믿음직한, 듬직한)의 “말”에 대해 이어진다.
정직한 사람은 태도에서 겸손, 성실, 공의로운 모습을 보이고 언어에서도 이에 걸맞는 품격으로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동체를 의뢰하는 “기도의 말”(9절), 공동체에게 “축복하는 말”(11절), 이웃의 비밀을 지켜주는 “듬직한 말”(12-13절)이다.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말”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의미겠다. 특히 지도자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솔로몬이 당부하는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자신이 통치권력의 정점에 있지 않고 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그의 태도에서부터 백성들에게 보여야 한다. 백성들은 왕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세운다. 그러니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백성들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따른다. 그러면 산다.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것을 간과하면 안되겠다. 나의 영향력은 업적으로 행사 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선명하게 보여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직함으로 겸손과 성실,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끼친다.
*기도의 말, 축복의 말, 듬직한 말로 백성들의 마음과 삶을 챙긴다.
나는?
-나의 말 한마디로 죽을 것 같은 시험이 들 수 있고, 용기와 격려를 얻어 살아나는 기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무수한 말은 되도록 하나님 앞에서 하고,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가르쳐 주시는) 절제된 말을 해야 겠다.
-나의 말이 살리는 말이 되도록 “기도와 축복의 말”은 쉬지 않겠다. 하지만 죽일 수 도 있는 ‘멸시와 비밀을 풀어내는 천박한 비웃음과 험담과 수다(12,13절)’의 입술은 잠그겠다.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비웃지만, 명철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새번역_11-13절)”.
-안과 밖이 같은 “정직”은 그에게서 들려지는 말과 보여지는 행동의 태도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다. 그 경외함의 태도가 정직, 겸손, 성실, 공의이며, 깊은 절제의 언어로 묵직한 울림을 준다. 지도자의 이런 모습이 지도력을 굳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은 자신 뿐 아니라 이웃, 공동체를 패망에 이르게 한다.
*의인의 정직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공의로운 태도가 공동체를 회복 시키고, 악인의 불의한 이기적인 태도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의인의 말은 하나님께 가장 많은 “거룩한 수다(기도)”를 주저하지 않고, 이웃에게는 절제하고 또 절제한다. 해야 할 말도 절제하지만, 그들과 관련되어 하고 싶은(소문 내고 싶은) 말은 더욱 절제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어 습관” 만으로도 영혼을 살린다.
*나는 어떨까? 주목 받을 수 밖에 없는 강단에서의 말만 신경쓰고 있지는 않을까? 강단과 일상의 언어가 간격이 상당하면 그 얄팍함이 곧 드러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강단에서 “말하여도” 일상의 말과 다르다면, 그 말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경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상당히 도전이 된다. 연이어 “언어”생활에 대해 묵상하게 되는 본문이 예사롭지 않다.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지혜로운 언어 생활을 해야 하겠다.
*정직함도 결국 “말”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말”로 시작하는 정직함이 행동으로 자연스레 보여진다면, 선한 영향력으로 열매 맺는다. 나에게 강단의 말과 일상의 말과 행동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레 연결되는 수준 높은(?), 그러나 당연한 삶이기를 갈망한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것이 다른지 모른다. 내 눈의 들보가 커서 다른 이들의 행태를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의 교회다움의 회복은 결국 나와 같은 목회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것에서 부터이다. 이것이 교회를 살린다.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이 각각 속한 공동체를 중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거창한 캠페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롭게 행하면 된다. 그러면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산다. 교회도 산다! 이런 살리는 길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주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직함으로 살게 하소서
**주님, 겸손과 성실, 공의로 살게 하소서
**주님, 살리는 말(기도와 축복)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죽이는 말(비방,험담, 비밀)은 삼가하게 하소서
**주님, 강단에서의 말과 일상의 말이 일치되게 하소서
1.정직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1절)
“정직(야솨르)”의 의미는 “곧고 바르며 정당하다”는 뜻이다. “직진”이라는 뜻도 있고, “안과 밖이 같은 의로운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솔로몬은 이런 사전적인 의미보다 “정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먼저 깨우친다.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새번역_1절)” 정확하고 정직한 저울추… 구약 시대 장사꾼들중 일부는 모양은 같은데 무게가 다른 두 개의 무게추로 사람들을 속였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 하셨고(신 25:13, 15) 선지자들의 회개의 외침 속에서도 무게추를 속이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 종종 등장한다(미 6:11). 잠언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중심 사역으로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그의 실제적인 종교개혁의 현장은 성전 보다 삶 이었음을 알수 있다. 특히나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왕하 18:3절)” 이다. “정직한 왕”이었다. 이런 그를 여호와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왕하 18:7)” 하게 하셨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건물인 성전 보수에 그치지 않는다.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올바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정직은 성전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행하는 것 이어야 했다.
*속이는 두 개의 저울추가 아니라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와 되를 지키면 “네 날이 길리라” 약속하셨다.(신 25:15)
2.정직은 겸손과 성실, 공의와 함께 한다(2-8절)
지혜는 겸손과 함께 한다(2절). 일상의 부요함의 통로는 “성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를 멸망 시키지 않으신다(3절). 일상을 든든하게 채우는 것은 “성실”이다. “공의(옳은 행실)”은 삶의 길을 곧게 한다. 악인은 자신의 공의롭지 못한 악 때문에 쓰러진다(5절). 곰곰히 생각해 보니 “태도”들이다. 지혜있는 자의 태도는 정직, 겸손, 성실, 공의가 어우러져 있다.
성실(투마)은 ‘완전한 상태, 무흠’이라는 의미가 있다. 정직과는 따로 갈 수 없는 속성이다. 성실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신실(아만)’은 “믿을 만한(faithful)”을 의미한다. 진실, 아멘과 의미가 통한다. 믿을만한 사람은 성실과 공의가 정직과 함께 어우러진 사람이다.
정직과 성실, 공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건짐을 받게 하지만, 불의로 모은 재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4절). 세상은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영원한 사망에 빠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하는 데서 오는 정직과 성실, 공의로운 삶의 태도, 즉 의로운 삶이다.
3.정직은 이웃과 공동체를 살린다(9-15절).
“하느님을 저버린 사람은 혀로 이웃을 죽이지만 착한 사람은 기도로 이웃을 살린다.(공동번역_9절)” 우연찮게 공동번역으로 본문을 살폈는데, 9절 말씀이 마음에 끌렸다. 하나님을 저버린 악인은 그 혀로 이웃을 죽인다. 하지만 의인은 기도(지식)으로 이웃을 살린다. 특히 개역본이나 새번역본은 ‘지식’으로 번역한 것을 ‘기도’로 번역하여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 “기도”임을 구체적으로 깨우친다.
11절의 공동번역도 “올바른 사람의 축복은 마을에 번영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의 말은 마을을 깨뜨린다.(공동번역)” 라고 했다. 마을을 깨뜨리는 것이 “말”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모욕(멸시)와 잠잠함의 이미지로, 13절도 “남의 비밀을 숨겨주는” 신실한 자(마음이 믿음직한, 듬직한)의 “말”에 대해 이어진다.
정직한 사람은 태도에서 겸손, 성실, 공의로운 모습을 보이고 언어에서도 이에 걸맞는 품격으로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동체를 의뢰하는 “기도의 말”(9절), 공동체에게 “축복하는 말”(11절), 이웃의 비밀을 지켜주는 “듬직한 말”(12-13절)이다.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말”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의미겠다. 특히 지도자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솔로몬이 당부하는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자신이 통치권력의 정점에 있지 않고 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그의 태도에서부터 백성들에게 보여야 한다. 백성들은 왕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세운다. 그러니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백성들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따른다. 그러면 산다.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것을 간과하면 안되겠다. 나의 영향력은 업적으로 행사 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선명하게 보여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직함으로 겸손과 성실,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끼친다.
*기도의 말, 축복의 말, 듬직한 말로 백성들의 마음과 삶을 챙긴다.
나는?
-나의 말 한마디로 죽을 것 같은 시험이 들 수 있고, 용기와 격려를 얻어 살아나는 기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무수한 말은 되도록 하나님 앞에서 하고,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가르쳐 주시는) 절제된 말을 해야 겠다.
-나의 말이 살리는 말이 되도록 “기도와 축복의 말”은 쉬지 않겠다. 하지만 죽일 수 도 있는 ‘멸시와 비밀을 풀어내는 천박한 비웃음과 험담과 수다(12,13절)’의 입술은 잠그겠다.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비웃지만, 명철한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새번역_11-13절)”.
-안과 밖이 같은 “정직”은 그에게서 들려지는 말과 보여지는 행동의 태도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다. 그 경외함의 태도가 정직, 겸손, 성실, 공의이며, 깊은 절제의 언어로 묵직한 울림을 준다. 지도자의 이런 모습이 지도력을 굳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은 자신 뿐 아니라 이웃, 공동체를 패망에 이르게 한다.
*의인의 정직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공의로운 태도가 공동체를 회복 시키고, 악인의 불의한 이기적인 태도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의인의 말은 하나님께 가장 많은 “거룩한 수다(기도)”를 주저하지 않고, 이웃에게는 절제하고 또 절제한다. 해야 할 말도 절제하지만, 그들과 관련되어 하고 싶은(소문 내고 싶은) 말은 더욱 절제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어 습관” 만으로도 영혼을 살린다.
*나는 어떨까? 주목 받을 수 밖에 없는 강단에서의 말만 신경쓰고 있지는 않을까? 강단과 일상의 언어가 간격이 상당하면 그 얄팍함이 곧 드러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강단에서 “말하여도” 일상의 말과 다르다면, 그 말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을 경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상당히 도전이 된다. 연이어 “언어”생활에 대해 묵상하게 되는 본문이 예사롭지 않다.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지혜로운 언어 생활을 해야 하겠다.
*정직함도 결국 “말”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말”로 시작하는 정직함이 행동으로 자연스레 보여진다면, 선한 영향력으로 열매 맺는다. 나에게 강단의 말과 일상의 말과 행동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레 연결되는 수준 높은(?), 그러나 당연한 삶이기를 갈망한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것이 다른지 모른다. 내 눈의 들보가 커서 다른 이들의 행태를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의 교회다움의 회복은 결국 나와 같은 목회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것에서 부터이다. 이것이 교회를 살린다.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이 각각 속한 공동체를 중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거창한 캠페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롭게 행하면 된다. 그러면 나도 살고 공동체도 산다. 교회도 산다! 이런 살리는 길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주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직함으로 살게 하소서
**주님, 겸손과 성실, 공의로 살게 하소서
**주님, 살리는 말(기도와 축복)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죽이는 말(비방,험담, 비밀)은 삼가하게 하소서
**주님, 강단에서의 말과 일상의 말이 일치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