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라맛레히가 아니라 엔학고레! [삿 15:1-20]
 – 2021년 12월 01일
– 2021년 12월 01일 –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된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 사건이다. 결혼식 이후 다시 처가에 방문하여 아내를 찾지만 장인은 삼손의 친구에게 딸을 주었으니 동생을 아내로 맞이 하라고 했다. 이에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꼬리와 꼬리를 매어 홰를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에 풀어 버린다. 이로 인해 이미 추수한 곡식 단을 비롯해 베지 않은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불에 탔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화가 나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인다. 이를 빌미로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쉰다(새번역_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들 삼천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서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나귀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이라고 부른다.

삼손이 너무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 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지낸다.



1.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에서 시작되었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이미 다른 친구에게 시집을 보내 버리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하는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 때문에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또 이를 빌미로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을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명이 동원됐다. 이런 마음으로 블레셋에게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 되어 버린 것이다.

*동족 한 명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 받겠다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사고로 3천명이 힘을 합한다. 그 마음을 블레셋을 향했어야 하는데…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 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 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니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서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새 나귀 턱뼈(15절)”을 보게하고 그것을 집어들게 하여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 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홀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했지만,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하셨다. 사람들의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사용하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도록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되어 함께 싸웠다!



2.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내가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이 찾아오면서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 들고서야, 이 싸움을 내가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 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으나,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의 갈증을 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려지는 그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가장 목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으니, 새 나귀 턱뼈를 손에 들도록 하셨고,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를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와 언제나 함께 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동안 압제를 받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 받으며 고통을 받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가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명을 모아 붙잡아 넘기기 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 된 것이다.

*삼손의 죽음의 고통에 이른 갈증이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심으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 부터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의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 당했어도 부를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년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블레셋은 삼손이 골치덩이였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 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 구원의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일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 주소였다.


나는?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구든지 사사시대와 다름 없는 이 시대 속에서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 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엔학고레”가 우리의 삶의 거처 어느 곳이든 그곳이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 상황을 지나면서 “부르짖음”이 사라져 버린 시대…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 임에도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며 “부르짖음”이 회복 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되려 블레셋화 되어 버려서 잉태 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된 “나실인”이었던 삼손 조차 자기의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여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여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압제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여망을 품지 않고 부르짖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전세계적인 전염병의 고통 속에서 되려 부르짖음이 사라져 버린 한국교회에 울리는 경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 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깨우쳐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없는 사랑의 은혜가 “부르짖음”을 토하게 하셔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어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 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 같이 자기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 했는가!


**주님, 홀로 싸우게 하지 않고 늘 함께 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라맛레히에 취하지 않고 엔학고레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삿 14:1-20 사사인가?

삼손이 블레셋의 딤나에 사는 한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는(13:24-25) 삼손의 모습이 맞나 싶다. 참람한 것은 블레셋의 40년간의 다스림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1.삼손에게서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태(1-4절)
삼손의 부모는 아들이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는 말에 낙담한다(2-3절). 부모의 마음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조른다. 그리고서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상견례’를 한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 덥쳐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인다. 하지만 이 일은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다(5-6절).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7절). 시간이 지나 결혼식을 하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자신이 찢어 죽인 사자의 몸에 벌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었는데(8절), 삼손은 이를 떠 먹는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 가져다 준다(9절).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하지만 삼손도 피 끓는 청춘이다. 이성에 대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문제는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부모님에게 자신이 하려는 이방결혼을 끝까지 고집한다. 당시 세계관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모의 반대도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 받은 과정이 앞의 11명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었을 때 세워졌지만, 삼손은 잉태 되기도 전에 부모의 특별한 준비로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졌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것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나실인의 본문은 져버리고 정욕을 따라 행동한다. 딤나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그 지역으로 들어가 7일 동안 잔치까지 벌이며 그 지역 청년들과 어울렸다. 사사로서의 구별된 모습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자랐지만, 경건의 모양은 몸에 베어 있지 않다. 나실인으로서 가치와 철학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 보이는 대로” 기분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사사였지만, 함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연대하지 않았고, 그저 홀로 기분따라 움직였다. 이런 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니….


*그런데 블레셋의 압제를 40년 동안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권위는 온 간데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됨은 찾아 볼 수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하고 추구한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과연 어떨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떼쓰며 구하고 “내가 좋하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블레셋 여인을 좋아해서 딤나까지 가서 결혼하는 삼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구무언이다…. 삼손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나….


2.그런데…(4절)
그런데 성경은 삼손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 하기 위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만 본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하여 블레셋 딤나로 내려 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삼손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럭비공처럼 톡톡 튀는 삶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진행 하셨다는 의미다. 만약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결혼식을 이용해 틈을 벌였다면, 부인으로 맞이한 여인을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데리고 왔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옳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말이다.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과 결혼한 여인을 “…그의 친구에게(20절)” 주고 만다. 도대체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삼손의 됨됨이는 결코 경건하지 않다.


*그렇다면 삼손의 이런 막무가내 됨됨이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시작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사라도 이처럼 엉망인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삼손이 엉망진창인 삶을 살고 있어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흔들림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삼손은 철 없이 딤나 여인과 결혼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실 것이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작당에 이리 저리 몰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그 “틈”을 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블레셋을 보복하신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이스라엘의 블레셋화의 상징과도 같은 삼손의 이방결혼 이라는 자기 멋대로의 계획을 오히려 블레셋을 깨뜨리시는 “틈”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제 멋대로인 삼손의 럭비공과 같은 삶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란 삼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산 삼손… 그런데 그 삶은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세워 졌지만, 지금은 제 멋대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삼손 처럼 “제멋대로”다.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이 마음을 쏟기 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것에 더 심취한다. 삼손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삶을 사용하시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블레셋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이 놀랍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나의 삶도 매한가지 아니겠나… 한량 없는 은혜로 부름 받아 살아가면서 여전히 제멋대로 살아가는데 삼손을 뭐라 할 수 없다. 삼손처럼 “틈”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활당하고 어이없는 “틈”을 놀라운 은혜로 메우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 내신다!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제멋대로의 삶을 감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제멋대로의 “틈”을 “기묘하게(신비스럽게) 메우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시는 이야기이다.


**주님, 늘 제멋대로 “틈” 벌려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틈이 메워졌습니다. 좀 더 “틈” 벌리며 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사사인가 의심스러울 삼손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여정을 이루셨습니다. 지금도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기만 한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아주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도 하나님 끝까지 붙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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