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인리히 법칙 [삿 16:1-14]
 – 2021년 12월 02일
– 2021년 12월 02일 –

엔학고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복의 경험을 한 삼손이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간다. 20년 동안 사사로 지냈지만 특별하게 한 일은 없다. 더구나 자기 눈에 좋을 대로 “보고” 행동하는 모습이 변함없다. 삼손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 연약함이 있었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삼손의 사사로서의 활동은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먼저, 다른 사사들과 달리 철저히 홀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싸움이 “여인”과 관련 되어 있다. 딤나의 여인이 무수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엔학고레를 외치며 시작 했다면 20년간의 사사로서의 활동의 마지막도 가사의 창기와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로 인해 마무리 되었다.


1.삼손과 여인
20년 동안의 사사로서의 기록은 전무하다. 본격적인 시작은 “엔학고레”였지만, 그 이후 뚜렷한 흔적이 없다. 딤나의 여인이 눈에 “보기”에 좋아서 결혼하려 했던 나실인으로서 전혀 어룰리지 않는 그 삶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 위험이나 타락은 단번에 곧장 찾아오지 않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점점 타락으로 빠져든다. 삼손의 삶이 딱 그랬다!

더구나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인 것을 결코 간과 한 적이 없다. 들릴라의 끈질긴 약점을 알려 달라’는 요청에 결국 머리카락을 밀면 힘이 없어 진다고 말했다(17절). 이는 자신의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킨 삶이 아니어도 적어도 외적으로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는 가장 형식적인 규례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접하지도 먹지도 않아야 한다는 규례들은 무시했어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았음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나실인 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한 들릴라의 말에 이마저도 포기한 것이다.


*삼손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여인을 만나 즐기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먼 거리도 불사한다. “가사(가자_Gaza)는 블레셋 지역의 주요 성읍 5개 지역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이다. 삼손의 출생지 소라에서 60km떨어진 곳이다.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까지 들어가 거리의 여인과 즐기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블레셋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고 가사의 힘과 안전의 상징인 성문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 빗장을 빼어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는 64km가 넘는다. 그 긴 거리를 뽑은 성문짝들을 가지고 가서 헤브론 앞산 꼭대기에 갖다 놓았다! 가사 사람들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블레셋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 놓았다. 블레셋은 삼손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일려고 골머리가 썩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은 전쟁에 출정하지도 않았지만, 홀로 싸워 이긴 삼손의 승리를 알게 한 것이었다.

*삼손은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이를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블레셋에게 두려움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삼손 한 명을 처리하지 못한 좌절감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고, 가장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겼던 가사 성읍, 그리고 성문짝들이 한 사람 삼손에게 풀려 버렸을 때 그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인을 찾아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괴롭히고 돌아왔다. 그렇다고 삼손의 방탕한 삶이 사사로서의 삶을 합리화 하지는 못한다.


2.”밤(의 여인)”을 사랑한 “작은 태양”(4-14절)
1-3절은 단순한 성욕이었지만, 들릴라와의 관계는 진지했다. “들릴라”의 뜻은 “밤의”라는 뜻이다. “삼손”의 뜻이 “작은 태양”이라는 뜻이니, 이름 풀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꽤 있다.

빛이 어둠에 감싸여 버렸다. 빛의 자녀인 삼손이 밤의 여인 들릴라에게 감싸여 버렸다. 빛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의 밤에 여전히 잠식되어 있다. 삼손의 상황이나 이스라엘의 상황이 매한가지이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아내며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어야 할 삼손은 되려 블레셋 여인들의 외모에 빠져 버렸다. ‘밤의’ 여인 들릴라의 아름다움에 빛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백성이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들도 사랑하고 말았다. 빛의 백성들이 밤의 우상에 마음이 홀려 버렸다. 밤의 여인이 작은 태양의 빛을 감춰 버렸다.

*보통 인간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던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라는 흑암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빛 된 자녀로 다시 회복시켜 주어야 함에도 이 사명을 소렉 골짜기의 한 여인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들릴라는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로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유혹했다. 삼손은 자신을 파멸로 내몰기 위해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과 거래한 여인이 그저 좋아 아슬 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었다.

*호리는 말과 취하게 하는 포도주의 힘은 삼손의 강력함에 틈을 발생 시켰다. 집요하게 묻는 들릴라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 차렸어야 했지만, “밤의 여인에게 푹 빠진 작은 태양” 삼손은 최소한의 분별력도 이미 사라졌다.


3.무엇으로?(5,6,10,13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당해 낼 수 없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근원을 알아내서 해결하고자 몸부림을 친다. 본문에서 “무엇으로” 그 큰 힘이 생기는지, 혹은 결박할 수 있을 지 블레셋 방백들과 들릴라는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5,6,10,13절).

삼손은 나실인이다. 겉으로 보면 그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임을 긴 머리카락만 보아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도무지 그가 나실인인지 헷갈린다. 만약 그의 삶이 육신의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방탕한 모습이 아니라 절제하고 구별되는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홀로 싸우는 전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러 모으는 진정한 사사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몰랐을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괴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파악하지 못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 답게 살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역설적 증거가 된다. 삼손이 도무지 말도 안되는 괴력으로 승리를 거둘 때마다, 도대체 그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헷갈리고 있다면, 삼손은 사사로서의 삶의 진정한 사명,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그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여리고성과 가나안 땅 주민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우리가 들었음이라(수 2:10)”

*삼손은 20년의 사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괴력은 소문이 났지만, 자신의 괴력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드러내지 못했다.

*나는 어떨까? 나의 삶 속에서 사람들의 평판은 있는데, 나의 평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볼 때 “무엇으로” 이렇게 하였는가?가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정말 대단하시다”라는 감탄을 들었으면 좋겠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회자 되면 좋겠다!


나는?
-하인리히 법칙(1:29:300의 법칙)이 있다. ‘작은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다 보면 큰 일이 생겨나고, 그 큰 일이 반복되다보면 대재앙이 찾아 온다’는 법칙이다. ‘300번의 작은 일들이 발생하면서 29번의 큰 일들이 생기고, 대재앙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에 무감각하여 제어하지 않으면 결국 큰 일이 터지고 말고, 큰 일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앙이 일어난다. 삼손의 삶이 딱 이렇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나,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도 의미가 통할 것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적합하지 않은 작은 잘못들을 아무런 감각 없이 무수히 반복함으로서, 큰 죄를 짓게 되었고, 그 큰 죄들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매여 있다 보니,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한 두 번 범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형식만 빼고 반드시 지켜야 했던 계명들을 범하는 죄를 반복하게 되었고 그런 삶이 결국 삼손의 삶을 파멸로 이끌었다.

-나실인 규정을 습관적으로 범하는 것에서 돌이키지 않으니, 딤나와 가사의 여인을 취하였고,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의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어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지경의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반복되는 죄를 끊지 않으면 더 큰 죄의 유혹에 직면하고 그 큰 죄들의 결과로 인생의 재앙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명심해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야 하는 삶은 순간 순간 죄의 유혹이라는 틈이 발생하기를 무수히 반복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몸과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물질, 명예, 게으름, 열등감, 분노 등의 틈을 타서 노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유혹할 것이다. 이 작은 틈을 메우지 않으면 큰 일을 지나 재앙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삼손은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 약점(틈)이 있었다. 사사로 세움을 받고 20년 동안 이 틈을 메우지 않았다. 메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메우지 않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그 틈을 타서 더욱 즐기며 살았다. 딤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됐지만, 금새 망각하고 60km가 넘는 거리를 기꺼이 이동하여 “가사”로 달려가 자기의 눈에 “보이는” 창기와 쾌락을 즐겼다. 삼손은 자신이 재앙에 휩쓸릴 수 있는 그 틈을 결코 메우지 않았다.

*또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가까운 소렉 골짜기에 사는 한 여인에게 마음이 빼앗겨 사랑에 빠졌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푹 빠졌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와 들릴라와 거래 했다.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각각 1,100세겔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자그만치 5,500세겔에(약 63kg)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들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삼손을 그저 거래의 대상, 이익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들릴라는 포기하지 않았고, 삼손은 이를 오락거리로 치부했다. 비슷한 실랑이가 반복 될 때 들릴라의 본심을 알아 챘어야 했지만, 삼손은 육적인 쾌락에 빠져 거짓된 사랑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


*나의 삶의 여러 가지 은혜의 흔적들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으로(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나?”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시다!”라는 인정함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구별되게” 살아야 함을 잊지 않겠다.


*주님, 반복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행동들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삿 15:1-20 라맛레히가 아니라 엔학고레!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된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 사건이다. 결혼식 이후 다시 처가에 방문하여 아내를 찾지만 장인은 삼손의 친구에게 딸을 주었으니 동생을 아내로 맞이 하라고 했다. 이에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꼬리와 꼬리를 매어 홰를 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에 풀어 버린다. 이로 인해 이미 추수한 곡식 단을 비롯해 베지 않은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불에 탔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화가 나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인다. 이를 빌미로 삼손은 다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찌르고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쉰다(새번역_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행동에 화가 나서 유다를 침공하여 ‘레히(턱뼈)’에 진을 친다. 이를 알게 된 유다 사람들 삼천명이 에담 바위 동굴로 몰려가서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긴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나귀 새 턱뼈를 손에 쥐고 천 명을 죽인다. 그리고 “라맛레히(나귀 턱뼈 언덕)”이라고 부른다.

삼손이 너무 목이 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을 구원해 주신다.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 부르짖는 사람의 샘)”라고 불렀다. 이 사건 이후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지낸다.



1.혼자서? 하나님께서 함께!!
삼손은 철저히 홀로 움직인다. 이전의 사사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연합하여 함께 싸웠지만, 삼손은 홀로였다. 외롭게 블레셋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원인은 개인적인 복수에서 시작되었다.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이미 다른 친구에게 시집을 보내 버리고 천연덕스럽게 아내의 동생을 소개하는 장인의 처사에 화가 나서 복수했고, 이 복수 때문에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아내를 불에 태워 죽이자 또 이를 빌미로 복수하여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블레셋은 이런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 버린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배신을 불러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삼손은 홀로 싸웠다. 블레셋의 40년 압제에 눌려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어느 누구도 삼손과 연합하여 블레셋을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삼손을 붙잡아 넘긴다.

*삼손 한 명을 붙잡기 위해 무려 3천명이 동원됐다. 이런 마음으로 블레셋에게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족 한 명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기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모았다.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화 되어 버린 것이다.

*동족 한 명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 받겠다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사고로 3천명이 힘을 합한다. 그 마음을 블레셋을 향했어야 하는데…

*삼손은 그렇게 홀로 싸웠다. 그런데 정말 홀로 였을까? 아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개인적인 싸움을 했던 그 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니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14절).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여서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찰나에 임한 여호와의 영은 삼손의 눈에 “새 나귀 턱뼈(15절)”을 보게하고 그것을 집어들게 하여 블레셋 사람 천 명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

*너무도 맹렬하게 싸웠기에 천 명을 죽이고 나서 “라맛 레히(나귀 턱뼈 언덕)”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심히 목이 말라” 탈진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홀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붙잡아 간 천 명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며 홀로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했지만, “여호와의 영”은 함께 계셨다.

*삼천명은 삼손의 싸움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하셨다. 사람들의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삼손의 손을 들어 사용하셨다! 레히(턱뼈)가 라맛레히(턱뼈 언덕)가 되도록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멈추지 않으셨다.

**동족들은 삼손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삼손은 동족들에게서 소외되어 홀로 싸웠지만, 하나님과 하나되어 함께 싸웠다!



2.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를 기념하여 ‘라맛레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감격적인 승리를 선포했지만, 이내 심한 갈증과 탈진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는다. 내가 천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것이 한계이며,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 명을 죽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극심한 탈진이 찾아오면서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 들고서야, 이 싸움을 내가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삼손은 목이 너무 말라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친히 이 크나큰 승리를 주님의 종의 손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목이 타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어야 하겠습니까?”(새번역_18절)

천 명을 나귀턱뼈 하나로 죽였지만, 자신의 목마름(갈증) 조차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터뜨려 주시지 않으면 대적들을 죽였으나, 대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체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삼손의 갈증을 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늘 함께 계셨기에 삼손이 외롭게 싸운 후 곤란한 상황 가운데 부르짖을 때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고 외친 신앙의 고백이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려지는 그 순간에도 함께 계셨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도, 가장 목말라 탈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셨으니, 새 나귀 턱뼈를 손에 들도록 하셨고, 휘두를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하셨다. 또 갈증이 극에 달하여 부를짖을 때 즉각 응답하신 것이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와 언제나 함께 하셨음을 증명하는 샘이 된 것이다.

*삼손이 이제껏 홀로 힘겹게 싸워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걷는 삶의 길에서도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특히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뜻의 “엔학고레”가 의미심장하다. 블레셋에게 40년동안 압제를 받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블레셋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과 교류하며, 통혼까지 자연스럽게 했기에 그들에게 압제 받으며 고통을 받고 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의 압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고통을 주는 존재가 블레셋이 아닌 삼손으로 여기고 장정 3천명을 모아 붙잡아 넘기기 까지 했다. 철저히 블레셋화 된 것이다.

*삼손의 죽음의 고통에 이른 갈증이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응답하여 주심으로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다스리게 되었다. 즉, 삼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승리의 샘물을 터져 나오게 하심으로 지독한 죽음의 갈증으로 부터 구원해 주셨다.

*사사기의 구원의 사이클이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 범죄-심판-부르짖음-구원-평화의 사이클에서 40년 동안 압제(심판) 당했어도 부를짖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엔학고레”에서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삼손은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지 않는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년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새번역_20절)” 삼손만 홀로 부르짖고 말았다. “엔학고레”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블레셋은 삼손이 골치덩이였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홀로 싸운 삼손, 함께 싸워 주신 하나님, 부르짖는 삼손, 갈증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화 되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 구원의 갈망이 없다. 엔학고레가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기막힌 일이 마지막 사사 삼손의 시대가 시작된 이스라엘의 현 주소였다.


나는?
*”엔학고레”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특히 더온누리교회가 “엔학고레”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구든지 사사시대와 다름 없는 이 시대 속에서 언제든지 나아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곳이 우리 공동체 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엔학고레”가 우리의 삶의 거처 어느 곳이든 그곳이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 상황을 지나면서 “부르짖음”이 사라져 버린 시대… 오히려 “부르짖음”이 더욱 간절하게 터져 나와야 할 시대 임에도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며 “부르짖음”이 회복 되기를 갈망한다.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압제를 당하면서 되려 블레셋화 되어 버려서 잉태 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된 “나실인”이었던 삼손 조차 자기의 눈에 보기 좋은 블레셋 여인과 자연스레 결혼할 정도여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여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압제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여망을 품지 않고 부르짖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전세계적인 전염병의 고통 속에서 되려 부르짖음이 사라져 버린 한국교회에 울리는 경종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부르짖음”을 잊어 버렸을 때 “부르짖음”을 깨우쳐 주셔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을 살렸듯이, 하나님의 제한없는 사랑의 은혜가 “부르짖음”을 토하게 하셔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화려한 승리의 장소인 라맛레히보다 부르짖어 응답받은 샘인 엔학고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화려한 승리의 라맛레히에 취해 부르짖어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엔학고레”를 간과 한다면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삶을 “엔학고레”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라맛레히 같이 자기 홀로, 자기 힘에 취해 살았겠지만, 엔학고레를 통해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비로소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섬길 수 있었다. 그에게 엔학고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 했는가!


**주님, 홀로 싸우게 하지 않고 늘 함께 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라맛레히에 취하지 않고 엔학고레를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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