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치스럽고 송구하지만…. [삿 16:15-31]
 – 2021년 12월 03일
– 2021년 12월 03일 –
세 번의 실패에도 들릴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대로 세 번의 경고(기회)가 주어졌는대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들릴라의 품에 방치한 삼손은 결국 힘이 빠져 나가 붙잡히고 ‘가사’의 깊은 감옥에서 놋 줄에 묶여 멧돌을 갈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즐기는 다곤 신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사사들을 보내 무수한 기회와 경고를 주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무수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 함에도 돌이키어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 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들릴라를 사랑했기로 자신의 약점을 캐묻기를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에 마음이 번뇌하고 죽을 지경이라니…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이었지만, 들릴라는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약속한 블레셋 방백들에게 진심이었다. 참 딱하다… 그런데 삼소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내가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자신을 옭아매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들릴라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의 무릎베게에서 이내 잠 들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릴라는 사람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이 머리털을 깍게 한 다음 일부러 괴롭혀 보기까지(새번역_19절)” 하며 블레셋 방백들이 주기로 한 은 5,500세겔에 ‘진심’으로 행한다. 삼손은 들릴라의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 라는 외침에 깨어나 “전과 같이” 하려 하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다(20절)” 붙잡혀 눈이 뽑히고, 놋 줄에 묶여 ‘가사’의 감옷에서 멧돌을 돌리게 되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이 떠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감각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삶의 맞이하게 될 ‘조롱과 멸시’의 비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하나님이 떠난 교회가 맞이 하게 될 모습이 분명하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두 눈이 뽑히고 놋 줄에 묶여 멧돌을 돌리는 노역을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삼손의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인 듯 하여 고통스럽다.

*암울한 조선에 들어와 의식을 깨우고 삶을 변화 시켰던 개화기의 한국교회의 능력이 보이지 않고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교회가 고통스럽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하여 고통스럽다. 정말 그럴까?



1.부끄럽고 민망하고 송구하고 송구하지만…
삼손은 들릴라의 돈에 대한 진심 때문에 자신이 진심이었던 사랑을 배신 당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 땅을 망쳐 놓은 원수,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셨다(새번역_24절)”며 삼손을 구경거리, 멸시거리로 삼았다. 이를 고스란히 당하는 삼손의 마음에 뒤늦은 후회와 울분이 넘쳐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곤 신정에 모여 큰 제사를 행하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곳에 끌려 나갔을 때, 자신을 향해 모욕과 비웃을 던지며 유흥을 즐기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새번역_28절).” 라고 외쳤다.

삼손은 끝까지 자기 생각만 했다. 자신을 태에서부터 불러 죽는 날까지 하나님게 바쳐진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원수” 갚을 간절한 마음에 부르짖었다. 사사로서의 사명으로,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완수 하려고 부르짖지 않았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달라고” 애원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여인을 보고 즐기는 삶의 결과로 이렇게 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사사로 20년을 보냈지만 자기 마음대로, 자기 힘을 따라 막무가내로 살아온 것을 도무지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이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었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고 송구하다….



2.’그러나 다시’그냥…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22절)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새번역_22절).”
삼손은 머리털이 깍였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자신의 힘의 원천의 비밀을 진심으로 이야기했을 때(17절) 이미 하나님의 영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눈 앞의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의 소중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만 것이다. 정욕에 눈이 먼 그는 들릴라의 의도도 간파하지 못한 채 나실인의 언약 조차 내팽개 친 것이다.

머리털은 깍였고, 두 눈은 뽑혔다. 그에게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힘은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았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손은 자신의 회복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멧돌을 돌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진 힘으로 인해 버겁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무력하게 되었다. 그 상태에서 회복을 위한 어떤 몸부림도 사치였다.

*우리의 구원 얻음이 이와 같지 않겠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의 여망을 심어 주신다. 나의 욕망과 적용으로 인해 철저하게 실패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머리털을 자라게 하시는 분이시다. 삼손이 머리털을 자라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털은 자연스레 그냥 자라났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은 이와 같다.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처럼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이다.

*어쩌다 망할 수도 있다. 아니 반복된 실수가 큰 죄를 짓게하고 큰 죄가 쌓여서 재앙을 만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큰 재앙이 몰려와 비참하게 되었어도 기억해야 한다. “머리털은 그냥 다시 자라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회복과 구원의 싹이 그냥 다시 자라난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덧 자라난 머리털을 보고 아.. 머리가 길었구나 느끼듯,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아무리 실패한 듯 보이고 완전히 무너진듯 보여도 그곳에서 다시 자라난다. 머리털이 밀렸어도 다시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두루마기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이 맞다! 완전한 실패에서도 다시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사랑이다.



3.부르짖으며 간구하되(28-31절)
그냥 자라나는 머리털, 그 희미한 복선만(희망만)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다. 삼손의 최후의 모습은 결코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본 모습이 아니다.

비록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마노아와 아내에게 약속하신 대로(13:5) 삼손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의 삶으로서 최후를 맞게 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개인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께 철 없이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철없는 삼손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다.

*어떤 동기이든지 삼손은 하나님을 찾았다. 평생 하난미을 찾은 적이 없던 그였지만,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 즉, “그냥 다시 머리털을 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이다.

*삼손은 사사기의 기록을 통해 딱 한 번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딱 한 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딱 한 번 찾고 구한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자신도 죽어갔다. 이런 삼손의 모습을 반드시 반면 교사 삼아야 겠다. 늘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 그래야 할까? 늘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사시대는 이것을 잃어버린 시대였다. 삼손은 아이러니하게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지만, 정작 살아 있을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 최후의 순간에 딱 한 번 부르짖고 찾아서 도움을 구한 것 뿐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삶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오미크론의 확산의 주범이 또 그리스도인이다.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사사(목사)다….. 화가 난다. 코로나 시대 교회는 사회를 향해 아무런 영양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채근 하지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느껴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눈이 뽑히고 놋줄로 묶여서 멧돌을 돌리며 온갖 조롱과 수치, 모욕을 받고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런 것 같다. 이것이 현실이자 현주소이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무력하게 무너져갈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삼손의 부르집음이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어야 한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새번역_28절)”

*우리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주님,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송구하지만,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십시오….
**주님, 코로나에서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머리털이 자라남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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