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장은 사사기의 결말이다. 그런데 배경은 사사시대 초기이다. 가나안 땅 분배가 이루어지고 여호수아가 죽은지 얼만 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준다. ‘…저마다 자기 뜻에 맞는 대로(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배치 되어 있다. 참담하게도 모든 에피소드가 레위인과 관련되어 진행된다. 레위인다운 레위인의 부재가 불러온 사사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요지경 속 사사시대… 어느 정도 였을까?
1.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주님, 나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영광을 위한 신앙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영광을 드러내며 살겠습니다.
**주님, 목사로 불러 주셨으니 목사답게 살다 주님 품에 안기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한 목사로 살겠습니다.
1.미신으로 전락한 여호와 신앙(1-6절)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의 한심한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의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단 미가의 집은 매우 부자이다. 자신이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은 1,100) 훔쳤다가 저주 받는 것이 두려워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훔쳤다가 솔직하게 돌려 주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더 나아가 그 돌려받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둔다. 심지어 미가는 이미 집에 신당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레위인도 아닌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기도 했다.
가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것이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미 안중에도 없고 관심조차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만홀히(무심하고 소홀히,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버릇 없이) 여기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혼란스러워 지는지를 분명하게 경고한다. 미가의 삶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돈을 훔친 자녀를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고 여호와께 은을 바친다면서 신상을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아들을 위하여(3절, 나의 아들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_새번역)”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섬기는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런 모습을 미가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미 집안에는 신당이 있고, 그곳에 에봇과 드라빔이 자리 잡고 있었다(5절). 내가 좋으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르고 만날 수 있다고 여겨 에봇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나의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좋다고 여겨 드라빔을 만들어 함께 섬기고 있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형식은 갖추고 싶어서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자리에 아들을 않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나안 땅에 이제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급속도로 나타난 황망하고 참담한 모습들 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레위인의 방황, 이스라엘의 방황(7-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급속히 떠나간 원인을 두고 쫓아내지 못한(혹은 않은) 가나안 민족들의 농경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서,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력의 부재로… 등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거론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7장부터 21장의 에피소드를 전개하면서 “레위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레위인”의 타락한 삶을 사사시대의 혼란스러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는 해석을 언급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력이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이 살아내야 할 가치인 율법(말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씀으로 살아내다 혹 실수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율법)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가르쳐 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났듯 부모세대가 말씀을 따라 오롯이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입술의 말을 듣고 사는 것이 아니라 ‘등’을 보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석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위인”의 사명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레위인 청년의 방황이 언급된다. 그가 ‘거주할 곳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아 각각 정착할 때, 가나안 주요 48개 성읍에 분산되어 배치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 성읍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삶이 정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레위인의 삶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48개 성읍에 속한 밭을 경작하며 살도록 정하여 주었다.
문제는 이 레위인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나 살 곳을 찾을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사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의 삶을 사는 레위인에 대한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먹고 살기 어려워 방황하다, 미가라는 부자를 만나 그 집안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이 뒤죽 박죽 여러 신들을 섬기는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는?
-16장부터 21장까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은 부르지만,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뜻 이런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선택하여 결정하는 삶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이 입술에 베여 있지만, 삶은 그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았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른 우상들의 이름도 함께 불렀다. 완연한 “종교놀음”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과 함께 ‘나를 위하여, 내게 복을 주실” 도구에 불과하다. 레위인은 이를 이루어 줄 고용된 종교인에 불과하다…
-참담한 사사시대의 모습이 깊은 함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때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놀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사사시대의 미가의 집안과, 레위인의 모습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화 하여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셔야 왜곡된 신앙이 나만을 위한 신상, 나만을 위한 제사장을 세우게 했다.
*신앙과 사역자를 사유화하여 우리만의 교회, 우리만의 제사장을 추구하려는 미가의 집과 다름 없는 유혹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겠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여야 하겠다. 종교놀음에 빠지지 말아야지…
**주님, 나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영광을 위한 신앙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영광을 드러내며 살겠습니다.
**주님, 목사로 불러 주셨으니 목사답게 살다 주님 품에 안기도록 힘쓰겠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과 영광을 위한 목사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