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유구무언 [삿 19:1-10]
 – 2021년 12월 07일
– 2021년 12월 07일 –
19장부터 21장 까지는 기브아 거민들의 레위인 첩에 대한 몹쓸 짓에서 파생된 동족상잔으로 일어난 베냐민 지파의 붕괴를 다룬다. 18장의 단 지파가 스스로 하나님만 섬기는 것과 분배 받은 땅을 버리고 고립을 선택한 모습과 베냐민 지파의 붕괴는 사사시대가 얼마나 급속히 이스라엘 공동체성이 무너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과 함께 무너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상실를 지적하는 것이다.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1절)”로 시작하는 본문은 18장의 모세의 손자로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요나단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주면서 특히 당시 레위인들이 그 사명과 본분을 어느 정도 잊어버렸지를 가감 없이 고발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이끄시고 모든 초태생에 대한 소유권을 말씀 하셨다(민 3:13). 그런데 혈통으로 보면 당연히 이스라엘 지파의 장자는 르우벤이 되어야 했지만, 빌하와의 간통으로 인해 장자의 권리를 상실 했었다(창 35:22, 49: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을 하게 하셨다(민 3:12). 이들에게는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의 직임을 일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을 도와 거룩한 제사의 직임을 수행하게 하셨다. 이는 제사 준비하는 일, 성막을 거드는 일, 그리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나안에 정착 한 후에는 성막이 자리잡은 실로를 포함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 전역의 48개 성읍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 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하며 돕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 제물과 십일조를 통해 유지하도록 하셨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절)”

그런데 본문의 어떤 레위인은 성읍의 이름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고 있다고 기록한다. “거류(게르)”는 “머무르다, 체류하다”라는 기본 의미가 있지만, 주로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살다’라는 뜻을 가진다. 즉, 이 레위인은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곳을 떠나 “에브라임의 산지 구석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가나안 족속들과의 치열한 분쟁 가운데서 스스로 산지로 숨어 들었는지, 아니면 그만한 사연이 있는 것인지 불확실 하지만 아무튼 레위인으로서 백성들의 본이 되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 하였다고 했다. 본문에서 ‘첩’으로 번역하여 사용한 단어는 “하 나아라”인데, “젊은 여자”를 의미 한다. 만약 사별하고 얻은 여인이라면 “첩”이 아니라 “두 번째 아내”라고 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첩을 얻는 것은 매우 흔한 일 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삶을 살아내는 레위인이 ‘첩’을 맞이 했다는 것은 그의 삶이 거룩함으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넉 달동안 지냈다(2절)” 개역개정이 “햄음”으로 번역한 단어 “자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 창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첩의 행음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첩에게 가서 “다정히 데려오고자(3절)” 했다는 것은 레위인 또한 어느 정도 첩의 행음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살아야 할 이 레위인은 웬일인지 에브라임 산지, 그것도 구석에 “거류”하고 있다. 자신과 상관 없는 사람들이 사는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미가의 제사장에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던 “요나단”도 “거류”할 곳을 찾아 방황하다 미가의 집에 채용 되었다. 그리고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하나님께서 정착하라고 주셨던 성읍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성읍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다.

*산지 구석에서 행음을 했다면 이지 지역사회에서 알려질 대로 알려질 일이었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이런 행음을 즐겼다면, 그의 삶이 얼마나 레위인의 정체성에서 변질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지냈다. 죄가 관영할 수록 죄에 대한 마음은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더 담대하게 죄의 유혹을 즐기기 마련이다. 이는 산지 구석의 공동체의 삶도 결코 거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회가 다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나는?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일단 배경이 에브라임 산지이다. 거기에 주인공은 레위 사람이고 베들레헴과도 연관이 있다. 모세의 손자 요나단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 또, 모두 범죄와 관련이 있는데, 요나단은 “우상숭배”, 이 레위인은 “음행”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에브라임 산지는 가나안 땅의 중심부이다. 이 사건이 모두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자 역할이 맡겨진, 레위 지파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또 이 사건들은 모두 레위인의 본연의 삶과 상관 없는 것에서 출발했다. 배치 받은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과 의지로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즐기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본문에서 주목하여 보이는 레위인의 행동은 “우유부단함”이다. 행음으로 처가에 피신한 첩을 데려 오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내려 간 일이며, 장인과 무려 나흘이 넘도록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아침에는 떠나고자 결심 했지만, 오후까지 즐기다가 다시 미루는 일이 무려 4일 동안 반복 되다가, 5일째 역시 아침에 출발하려다가 미루게 되고 저녁이 다 되어 굳이 출발했다. 첩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 되었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했다는 의미다. 사사시대의 상태의 핵심을 보는 듯 하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그 길에서 돌아서기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기브아의 밤”을 만난다.

*이런 모습 낯설지 않다. 지금 누리는 재미에 마음이 잡혀 ‘이래서는 안되는데…’ 마음의 외침을 따라 돌이키는 것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 화를 당한다.

*애초에 무너진 거룩의 삶도 문제지만, 박차고 일어날 때를 미루고 미루면 결국 기브아의 비극의 밤이 엄습한다. 이것이 사사시대이다.

*레위인의 모습에 “유구무언”이다. 도무지 이 참담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주님, 미루고 미루다 당할 비극이 저에게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영적 결단을 신속하게 하겠습니다.
**주님, 레위인의 무너진 삶이 남일 같지 않습니다. 꼭 반면교사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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