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장은 왕이 없었던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난 비극적 일화를 연속적으로 소개한다. 18장은 제사장의 사유화, 생계유지를 최우선하는 제사장의 영적 탈선을 고발했다면 19장은 레위인 제사장의 도덕적 탈선과 잔혹함을 고발한다. 레위인의 도덕적 탈선은 19장 초반부에서 다루었고, 본문은 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다룬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겁게 저녁을 보내는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 닥친다. 입에 담기에도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 사람이 밤을 지내기 위해 이방인 성읍 여부스에 가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도 없을 뿐더러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됐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 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 수록 불편하다. 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인 수준도 그러한데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 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행한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직역_벨리알의 아들들)’는 무엇인가에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 멋대로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이 없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 밖에 남지 않은 것 아닌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 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는 ‘동성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 등이다. 이들의 이런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은 “그 성읍의 불량배들”을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야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 2번 반복된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아담”이 아니라 “에노쉬”를 사용했다. ‘에노쉬’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 죄 많고 사악한 인간”을 지칭한다.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방탕한 무리들인지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 멋대로’ 살며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에 눈을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이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이한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었다. 하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 닥치자 그 모습이 온간데 없이 사라진다.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들에게 먼저 점잖게 타일렀다(23절).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제안을 함께 한다. “레위인 대신 자신의 두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고 한다.
여기에 레위인은 더 기막히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25절)” 버린다. 강제적으로 불량배들에게 넘긴 것이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했고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그친다.
노인이나 레위인이나 자신들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고 했고, 레위인은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당시 세계관에 따라 노인의 이해하지 못할 말은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 치더라도 레위인은 자기 살겠다고 첩을 문 밖으로 강제로 “붙잡아… 끌어내는”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서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 받는 그 시대의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 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 그 시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살아간”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인 것이다.
율법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 더 해박하게 알고 있었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았던 선생된 레위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들 마저도 기꺼이 희생 시키겠다는 철저히 왜곡된 ‘환대법’의 왜곡에서 생명존중과 여성 인권은 없었다. 자신의 명예만 추구할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된 사건이다.
3.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됐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본문을 읽어 내려 가지만 이 분노가 더 폭발하게 된다.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악몽과 같은 밤을 강제로 “붙들려 끌어냄”을 당한 가련한 여인이 새벽 미명에야 풀려 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앞 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서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고 있었지만,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다. 어떤 부분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준 첩에 대한 걱정이 없다. 자신의 첩을 내어 주어 확보된 안전함 속에 편히 잘 동안 자신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 개정은 그렇게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와서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26절)고 증언한다. 그리고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나고자 했던 레위인이 문을 열고 나와 이를 보고 너무도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 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28절)고 기록한다. 그리고서 시체가 된 그녀를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고 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라고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그냥 “그녀”라고만 기록되었다. 헬라어(70인경)로 번역되면서 “그녀”가 “그의 시체(28-29절)”로 번역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의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비극으로 치닫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더구나 29절의 “거두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25절에서 첩을 “붙들어”라고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 밤에는 자신의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침을 당하여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하였지만,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한 자신의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자신의 남편에게 붙들림을 당하여 남편에게 능욕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레위인은 밤새 몹쓸 짓에 만신창이가 되어 탈진한 그녀를 살인하고 열 두 토막을 내어 온 이스라엘에 보낸 것이다. 자신이 지난 밤에 당한 불명예스러운 일을 복수하고자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리려는 경각심이 목적인 듯 하지만, 아니다. 레위인이 원하는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 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복수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더 잔혹해 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경우가 다른 무수한 예들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본능 충족을 위해 “제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지…
–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땅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미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어서 이 잔악한 일이 멈춰지지 않았고,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기브아를 방문한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이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악한 행동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이나 레위인, 불량배들 역할만 다를 뿐 모두가 악했다. 레위인의 첩의 비극적인 죽음은 불량배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나 레위인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함이 어느 정도였느냐 라고 말할 때 불량배들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면 안 된다. 오히려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노인인듯 하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이미 그의 마음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도 서슴치 않고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고,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애를 요구하다 집단 성폭행도 서슴치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것은 이들의 악함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기브아에서의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여인의 시신을 열 두 토막을 내어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낸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이나,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 당하는 자의 절규가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죽인 가련한 여인의 시신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깨닫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철저히 인권이 경멸당하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 명분을 위해 약자들을 희생시켜 이득과 명분을 합리화하는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더 잔혹한 악인 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다.
*주님, 참담한 마음에 입술이 깨물어 집니다. 제가 이런 삶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주님, 노인이나 레위인,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다 한통 속입니다. 혹시 제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척 하지만, 세상의 악인들과 다를 바 없지는 않을까요? 깨달아 그 길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겁게 저녁을 보내는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 닥친다. 입에 담기에도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 사람이 밤을 지내기 위해 이방인 성읍 여부스에 가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도 없을 뿐더러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됐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 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 수록 불편하다. 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인 수준도 그러한데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 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행한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직역_벨리알의 아들들)’는 무엇인가에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 멋대로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이 없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 밖에 남지 않은 것 아닌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 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는 ‘동성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 등이다. 이들의 이런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은 “그 성읍의 불량배들”을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야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 2번 반복된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아담”이 아니라 “에노쉬”를 사용했다. ‘에노쉬’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 죄 많고 사악한 인간”을 지칭한다.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방탕한 무리들인지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 멋대로’ 살며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에 눈을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이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이한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었다. 하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 닥치자 그 모습이 온간데 없이 사라진다.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들에게 먼저 점잖게 타일렀다(23절).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제안을 함께 한다. “레위인 대신 자신의 두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고 한다.
여기에 레위인은 더 기막히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25절)” 버린다. 강제적으로 불량배들에게 넘긴 것이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했고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그친다.
노인이나 레위인이나 자신들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고 했고, 레위인은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당시 세계관에 따라 노인의 이해하지 못할 말은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 치더라도 레위인은 자기 살겠다고 첩을 문 밖으로 강제로 “붙잡아… 끌어내는”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서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 받는 그 시대의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 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하는 그 시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살아간”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인 것이다.
율법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 더 해박하게 알고 있었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았던 선생된 레위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들 마저도 기꺼이 희생 시키겠다는 철저히 왜곡된 ‘환대법’의 왜곡에서 생명존중과 여성 인권은 없었다. 자신의 명예만 추구할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된 사건이다.
3.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됐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본문을 읽어 내려 가지만 이 분노가 더 폭발하게 된다.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악몽과 같은 밤을 강제로 “붙들려 끌어냄”을 당한 가련한 여인이 새벽 미명에야 풀려 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앞 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서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고 있었지만,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다. 어떤 부분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준 첩에 대한 걱정이 없다. 자신의 첩을 내어 주어 확보된 안전함 속에 편히 잘 동안 자신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 개정은 그렇게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와서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26절)고 증언한다. 그리고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나고자 했던 레위인이 문을 열고 나와 이를 보고 너무도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 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28절)고 기록한다. 그리고서 시체가 된 그녀를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고 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라고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그냥 “그녀”라고만 기록되었다. 헬라어(70인경)로 번역되면서 “그녀”가 “그의 시체(28-29절)”로 번역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의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비극으로 치닫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더구나 29절의 “거두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25절에서 첩을 “붙들어”라고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 밤에는 자신의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침을 당하여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하였지만,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한 자신의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자신의 남편에게 붙들림을 당하여 남편에게 능욕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레위인은 밤새 몹쓸 짓에 만신창이가 되어 탈진한 그녀를 살인하고 열 두 토막을 내어 온 이스라엘에 보낸 것이다. 자신이 지난 밤에 당한 불명예스러운 일을 복수하고자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리려는 경각심이 목적인 듯 하지만, 아니다. 레위인이 원하는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 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복수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더 잔혹해 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경우가 다른 무수한 예들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본능 충족을 위해 “제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할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지…
–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땅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미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어서 이 잔악한 일이 멈춰지지 않았고,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기브아를 방문한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이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악한 행동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이나 레위인, 불량배들 역할만 다를 뿐 모두가 악했다. 레위인의 첩의 비극적인 죽음은 불량배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나 레위인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함이 어느 정도였느냐 라고 말할 때 불량배들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면 안 된다. 오히려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노인인듯 하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이미 그의 마음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도 서슴치 않고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고,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애를 요구하다 집단 성폭행도 서슴치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것은 이들의 악함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기브아에서의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여인의 시신을 열 두 토막을 내어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낸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이나,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 당하는 자의 절규가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죽인 가련한 여인의 시신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깨닫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철저히 인권이 경멸당하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 명분을 위해 약자들을 희생시켜 이득과 명분을 합리화하는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더 잔혹한 악인 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다.
*주님, 참담한 마음에 입술이 깨물어 집니다. 제가 이런 삶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주님, 노인이나 레위인,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다 한통 속입니다. 혹시 제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척 하지만, 세상의 악인들과 다를 바 없지는 않을까요? 깨달아 그 길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