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피난처와 산성 되어 주시기에… [욜 3:9-21]
 – 2021년 12월 20일
– 2021년 12월 20일 –
두로와 시돈, 블레셋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행하시는지 선포한다. 메뚜기 재앙으로 황폐해진(1:4) 땅은 무화과나무가 말랐고, 포도나무는 과실을 맺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엘서의 마지막은 회복의 은혜가 넘쳐난다. “거두어 들일 곡식이 다 익었으니 너희는 낫을 가지고 와서 곡식을 거두어라.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마다 술이 넘칠 때까지 포도를 밟듯이, 그들을 짓밟아라.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이다(새번역_13절).” 추수할 때가 다 되었듯, 심판의 때가 다가왔음을 선언한다. 심판의 때를 선언하는 말씀이지만, 황무하여 거둘 것이 없었던 땅에 풍성한 소출이 맺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심판의 때가 임박한 것을 선언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며,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하라(10절)”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되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에 함께 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선언 하실 때는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싸우는 일이 사라진다(사 2:4, 미 4:3). 하지만 하나님이 전쟁을 선언하실 때는 평활르 상징하는 도구들이 전쟁 도구로 바뀐다. 보습이 칼로, 낫이 창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된다. 열방이 멸시했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칼과 창이 되어 열방의 민족들을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세운다. 여호사밧(심판주) 골짜기에서 단호한 하나님의 보복이 실행된다.

*앞서 행하시며 선제적인 해결을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칼과 창이 되어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조소와 비방이 서슴없어진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정체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서 있는 백성들이 그립다.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과 에돔이 황무지가 될 것(19절)이라고도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 역시 두로와 시돈, 블레셋과 마찬가지로 유다 자손에 대하여 포악하게 행하여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열방, 애굽과 에돔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이들을 뚜렷이 기억하신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이들의 죄를 반드시 물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들에게 멸망과 저주의 날이 반드시 임한다. 이를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지 않겠는가!

*아! ‘내로남불’의 삶을 사는 악인들의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이셔서 감사하다. 그 하나님을 요엘은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16절)”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피난처와 산성 답게 그 백성을 보호하시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아는 것”을 증거 한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맞설 전쟁에서 피난처와 산성 되어 주셔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그 편에 서서 맞설 때 든든한 안전처가 되시는 하나님 이시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 내 땅 가나안을 회복 시키실 때,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유다 자손들에게 악행을 서슴치 않았던 나라들의 죄를 심판하신다. 애굽과 에돔은 황무하게 되지만, 가나안 땅은 회복된다.


나는?
정해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것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인데, 바로 ‘심판’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여호사밧). 이 이름에 걸맞게 민족들을 심판하신다.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심판의 하나님이 “피난처와 산성”의 하나님이 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16절). “하나님의 백성”만이 심판의 자리에서 예외가 된다. 모든 열방이 두려움으로 받게 될 심판의 자리가 피난처와 산성처럼 안전한 자리가 된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이들일까?

“이스라엘아, 그 때에 너희는,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거룩한 산 시온에서 산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도성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17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은 심판의 자리가 피난처와 산성이 되는 특권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에 열방들에게 조소와 멸시와 핍박을 견디었던 이들이 그 고통을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피난처가 될 수 있다. 그저 지식과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삶의 실제가 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인내”가 없으면 얻지 못할 특권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때문에 기꺼이 하나님의 이름을 배신 하지 않는 믿음과 인내가 심판의 날이 이를 때 모든 열방이 심판 받는 자리가 피난처와 산성의 특권을 누리게 한다.

하지만 애굽과 에돔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폭력과 살인으로 유린한 이들을(19절) 똑같이 그들이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망의 저주 뿐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천박한 자본주의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대하여 폭력을 서슴치 않고, 부당한 법치논리로 생명을 해하는 이들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 그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여호사밧)을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까? 나는 심판의 때에 하나님의 칼과 창일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피난처와 산성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믿음과 인내로 살고 있을까?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있을까?”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다고 했는데, 매일 매일 기록된 말씀을 통해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알려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고 있을까? 그래서 심판의 주님이 아니라 피난처와 산성, 즉 구원의 주님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피난처와 산성 되시는 주님의 품에 늘 거하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붙들 수 밖에 없다. 살기 위해 붙든다. 그랬더니 도리어 말씀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이토록 감격스러운 것인지 확인하게 된다.

*자기 생각과 이성,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 피난처 되신 하나님, 산성 되시는 하나님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자기 생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기쁨”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기 번민과 고뇌의 덫에서 속히 벗어 나기를 기도한다. 살아계신 주님께 부르짖고 매달리면 반드시 말씀이 역사할 것이다.


**주님, 주님을 더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당당히 주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피난처와 산성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 안에서 평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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