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중재자 바울 [몬 1:17-25]
 – 2021년 12월 22일
– 2021년 12월 22일 –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중재와 보증을 선다. 부탁과(17, 20-21절) 보증(18-19절)을 번갈아 가며 중재한다. 특히 오네시모로 인해 손해 본 것이 있다면 자신이 모든 것을 담당하겠다고 중재한다.

한 영혼을 위한 노사도의 헌신이 놀랍다. 손해를 본 자와 손해를 끼친 자를 중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서로의 시각차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네시모와 빌레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이런 공통 분모를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더 큰 용기”를 내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을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직접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 중재자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된다. 바울은 기꺼이 중재자의 자리를 자청한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 놓아 주십시오.(새번역_18)”

아… 바울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내 앞으로 달아 놓으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말과 행동이 십자가 위에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한 예수님처럼 말이다.


*중재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 서로 간의 관계에 화평이 일어나도록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중재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희생할 수록 중재의 열매가 확실한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간혹 중재자가 ‘중심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양쪽이 맞추면 된다는 식이다. 중재가 아니라 강요와 억압이다.

*바울은 자신이 충분히 빌레몬에게 권면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빌레몬의 의사를 존중했다(8-9절). 더 나아가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친 물질까지 대신 갚을 마음이 있음도 밝혔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중재할 수 있을까?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해 “내가 갇혀 있는 동안 얻은 아들(10절)”, ” “그는 내 심복(마음)이라(12절)”,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7절)”라고 표현한다. 복음으로 낳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 중재자의 자리에 기꺼이 선다. 사랑하면 함께 감당한다.


*바울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모름지기 믿음의 어른에게서 기대하는 모습인 듯하여 더 푸근하다. 리더와 동역자간에 끈끈한 신뢰와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 리더가 동역자를 신뢰하는 마음에 확신이 있다.

*도망친 노예가 붙잡혔을 때 기다리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오는 암울함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와 기쁨을 만들어가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기믹히다! 노예가 물건 취급을 받고 단돈 몇 푼에 거래 되는 인간성 상실된 비참함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대신 지불하더라도 자유함과 온전함 회복을 기꺼이 만끽하게 하려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어 좋다!

*두려움, 불안, 초조, 근심, 염려… 온갖 단어를 동원 하더라도 용서 받기 전의 오네시모를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내 바울의 편지를 받아든 빌레몬의 표정과 용서의 행동에서 용서를 기다리는 이에게 평안이 일었으리라. 그곳이 하나님 나라였다. 그곳이 하나님의 평안이 가득 찬 천국이었다.

*용서와 사랑이 일어난 곳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일어난다. 내가 속한 지금 이 곳에서 그 기쁨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를 소망 한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사랑과 용서, 중재와 화해의 천국을 보기 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중재하는 삶을 사는 존재다. 중재는 예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삶의 열매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중재는 자기 희생의 중재이다. 권위와 명령을 앞세운 일방적인 결저잉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공감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일깨워서 스스로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바울의 예처럼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주더라도 인격과 인격이 예수님처럼 중재하게 하려는 헌신의 마음과 자세도 중요하다.

*결국 중재는 당사자들 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만, 중재자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때 용서와 화해의 덕이 세워진다. 나를 위해 하나님께 중재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그 중재가 하나님과 나를 화해하게 했듯, 나도 이 땅을 살아가며 예수님처럼 그렇게…


*주님, 노사도의 사랑과 희생의 중재에 고개가 숙여 집니다. 제게 맡겨주신 공동체 안에서 저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중재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결국 사랑하면 중재의 부담도 감당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예수님의 중재를 진행 하셨듯, 저도 이곳에서 복음으로 중재하고 사랑으로 헌신하겠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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