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 [골 3:1-11]
 – 2021년 12월 28일
– 2021년 12월 28일 –
바울은 율법주의, 신비,은사주의, 세상살이 방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늘의 방식(위의 것)을 찾으라(추구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늘의 방식을 추구할 수 있을까?


1.위의 것을 생각하라(찾으라)(1-2절)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위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미 천국의 시민권자가 된 존재라고 말한다(빌 3:20).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천국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라고 말했다(벧전 2:11). 그렇기에 땅의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취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들(세상살이 방식, 율법주의나 은사주의 등)에게서 마음을 비운다. 땅의 것에 천착하지 않는다.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 위의 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고대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이 자세를 강조하셨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이 땅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고대하고 추구하라는 것이다.

당시 골로새 교회가 직면한 여러 이단들의 공격에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고, 큰 지진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을 구하고 또 찾으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절)”에서 “생각하다(프로네오)”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생각하다, 판단하다,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의역하면 “마음에 두고 그 일을 행하라”는 뜻 정도 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존재라면 위의 것에 마음을 두고 그 일을 행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위의 것”은 5절에서 밝히는 땅의 것들(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우상 숭배 등)과 반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6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밝힌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땅의 것들은 결국 모두 사라지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자세 이기도 하다.


2.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은?(7-11절)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하다. 땅의 일들(5절)과 ‘분노, 격분, 악의, 훼방,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려야 한다(8절).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옛 사람과 그 행실(5, 8절)을 버려야 한다(9절).

그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른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 구원에 이른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요청되는 삶이다(11절).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새번역_3절)”와 같은 말씀처럼 땅의 것에 죽었고 위의 것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당연하고 당연한 것이다.

*특히 4절은 “여러분(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새번역)” 라고 선언하며 땅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과 “영광”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에 주어졌고, 이는 이 땅을 살아갈 때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땅)은 하늘(위)의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땅의 것만을 혈안이 되어 찾아 다니기에 위의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추어진 것”이다. 복음이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롬 1:16), 복음을 거절하고 세상의 것, 철학, 헛된 속임수에 천착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못 된다!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하늘)을 바라본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정의한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새번역_10-11절)”

바로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아 새 사람을 입어 새로운 삶의 방ㅎ식에 이르는 데 있어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다. 특히 인종과 피부색으로 차별하지 않고 제국 시민과 노예로 차별하지 않으신다. 성별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신분으로도 차별하지 않으신다.

야고보 사도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고 했고 이것은 분명한 죄라고 정의했다(약 2:9). 그런데 의외로 교회 안에서 이런 차별이 여전함을 부인할 수 없어 씁쓸하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단순하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1, 4절) 존재이기 때문이다. 땅의 것은 이미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연합된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3절) 때문이다.

-버려야 할 땅의 것도 단순하고 명쾌하게 구분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등”이다(5, 8절). 이런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6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땅의 것을 과감히 버리고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누구나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하나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옛 사람과 옛 것의 행위들을 벗어(9절) 버려야 한다.

-이전의 세상과 하나되어 세상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었음을 마음에 두고 일을 행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출발은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한다는 믿음이다.

-결국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은 땅의 것을 버려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즉, 위의 것을 찾는 것과 땅의 것을 버리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세상 살이 방식을 거절하고 자기 이익에 함몰되는 삶을 초월하는 것이 곧 복음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위의 것을 찾는 삶이다.

-그리고 위의 것을 찾는 삶의 특징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은 바로 “차별이 없는 것”이다.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를 받고서 차별을 당연시 하는 잔재들이 남아있는 요즘에도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다. 어느 정도의 차별을 문화와 관습에 따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분명한 분별력을 가져야 하겠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벌여야 할 땅의 것과 분명하게 대비하여 강조하신 것이 “차별”이다. 그만큼 사소한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차별없는 사랑과 은혜를 본받아 차별없는 생각과 태도에 순종해야 겠다.


*주님, 위의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예수님과 하나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겠습니다.
*주님, 차별 없이 베푸신 은혜 차별 없이 소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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