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삶을 비교한다. 여러가지 표현으로 비교하지만, “세우는 자와 파괴하는 자”로 갈무리 할 수 있겠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그 안에는 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열 시키고 파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솔로몬은 누가 세우는 사람이고, 누가 파괴하는 사람인지 여러 표현으로 그 정체를 밝히면서 그 결과도 함께 거론한다.
1.세우는 사람은?(2절)
지혜로운 사람이다(1절). 그가 걷는 바른 길을 정직함(2절), 지혜로운 말(3절), 정직한 증언(5절), 자기 행동을 삼가는 것(15절), 악을 떠나는 것(16절), 지식으로 사는 삶(18절) 등으로 연관하여 표현하였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다지고 세우느냐, 허물어 지게 하느냐에 영향을 준다. 이런 행동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 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새번역_2절)”
세우는 사람의 바른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 잠언의 반복되는 주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그의 살아계심을 믿을 때 자연스레 드러난다. 또, 그의 세밀하게 살펴보심(감찰하심)을 의식하는 이에게 보여지는 태도이다. 이것을 믿고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내기 위해 그의 말씀을 찾고 듣고 깨달아 순종 한다.
하나님을 경외 하면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기에, 그 앞에서 지혜와 정직함으로 살아간다. 그런 삶이 자신의 집(삶) 뿐 아니라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특히 왕은 더욱 이렇게 살아내어 이스라엘을 세워가는 자이어야 했다.
2.허무는 사람은?
허무는 사람은 “패역하게 행하여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2절)”이다. “패역”은 “비뚤어지고 떠난다”라는 의미가 있다. 본문에서 “마음이 굽은 자(14절)”와 연결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비뚤어 지고” 행동에서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길을 걷는 사람이다. 이런 행태를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비뚤어지고(2,14절) 삶에서 하나님을 떠난 ‘패역’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한다. 그런 삶의 특징을 “교만한 입(3절), 거짓말(거짓 증언_5절), 거만하고 무식함(6-7절), 죄를 심상히 여김(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김_새번역_9절), 귀가 얇음(15절), 방자하여 자신을 과신함(16절), 노하기를 속히 하고 악한 계교를 꾸밈(17절)” 등으로 표현했다.
자기 잘난 체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거드름을 한껏 피우고, 거짓에 능하며, 자기 꾀에 넘어진다. 악한 계략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9절이다. “②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 / ②’어리석은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빌림’은 잠언 전체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킴. 단순히 ‘둔한 사람’과 구별됨(새번역)”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고 정한 “속죄 제사”를 우습게 여긴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이 비뚤어지고 멀리 멀리 떠난 삶”의 단적인 증거가 예배 생활에 대한 태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는 거절하고 내가 추구하고 탐욕하는 길에만 집중하는 삶의 태도라 할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과 관계의 바로미터인 “예배”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인생을 세우는 사람인지, 허무는 사람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좌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그에게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시간보다, 내 자신이 추구하는 만족과 유익을 위해 이것에서 “비뚤어지고 떠나 버린” 태도와 마음이 깨달아 진다면 속히 돌아서야 한다.
*자신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기 전에 다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다시 세워지고”, “생명의 길”로 돌아올 수 있다.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이 “지혜로움과 정직함”으로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세우는 삶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 하는 데서 힘과 능력이 나온다. 하나님에게서 “세움”의 은혜와 능력이 공급된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다고 세상 따라 망하는 길, 허물어뜨리는 길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거짓과 교만과 자기애에 집착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틀고 스스로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 그분 앞에 나의 삶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의 특권을 스스로 걷어차면 안 된다.
-예배를 통해 나를 만나 주시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내밀히 교제해 주시는 특권을 “비틀면” 안 된다. 사역과 봉사를 통해 활력을 주시는 기쁨을 등한시 하면 안 된다. 특히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사죄의 한량없는 감격과 은혜를 스스로 걷어차는 “비뚤어짐과 떠남”은 결코 빠지지 말아야 할 길이다.
-나는 세우는 사람일까? 허무는 사람일까? 내 자신 뿐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강한 공동체로 세우는 사람일까?
-세우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세워진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지혜로 세워진 사람이 집과 공동체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세울 수 있다. 철저하게 “본”을 보임으로 세운다. 번지르한 속빈 강정처럼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외함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게 살기 위해 “지혜를 찾고, 듣고, 가르침(훈계)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
-나도 솔로몬이 당부한 그 지혜자의 삶, 곧 세우는 사람으로 살아내기를 오늘도 결심해 본다.
**주님, 세우는 사람 되도록 더욱 주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 지혜로움과 정직함으로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이것이 나를 세우고 집을 세우며 공동체를 세워지게 할 줄 믿습니다.
1.세우는 사람은?(2절)
지혜로운 사람이다(1절). 그가 걷는 바른 길을 정직함(2절), 지혜로운 말(3절), 정직한 증언(5절), 자기 행동을 삼가는 것(15절), 악을 떠나는 것(16절), 지식으로 사는 삶(18절) 등으로 연관하여 표현하였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속한 공동체를 더욱 다지고 세우느냐, 허물어 지게 하느냐에 영향을 준다. 이런 행동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 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새번역_2절)”
세우는 사람의 바른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 잠언의 반복되는 주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그의 살아계심을 믿을 때 자연스레 드러난다. 또, 그의 세밀하게 살펴보심(감찰하심)을 의식하는 이에게 보여지는 태도이다. 이것을 믿고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내기 위해 그의 말씀을 찾고 듣고 깨달아 순종 한다.
하나님을 경외 하면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기에, 그 앞에서 지혜와 정직함으로 살아간다. 그런 삶이 자신의 집(삶) 뿐 아니라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특히 왕은 더욱 이렇게 살아내어 이스라엘을 세워가는 자이어야 했다.
2.허무는 사람은?
허무는 사람은 “패역하게 행하여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2절)”이다. “패역”은 “비뚤어지고 떠난다”라는 의미가 있다. 본문에서 “마음이 굽은 자(14절)”와 연결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비뚤어 지고” 행동에서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길을 걷는 사람이다. 이런 행태를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비뚤어지고(2,14절) 삶에서 하나님을 떠난 ‘패역’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한다. 그런 삶의 특징을 “교만한 입(3절), 거짓말(거짓 증언_5절), 거만하고 무식함(6-7절), 죄를 심상히 여김(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김_새번역_9절), 귀가 얇음(15절), 방자하여 자신을 과신함(16절), 노하기를 속히 하고 악한 계교를 꾸밈(17절)” 등으로 표현했다.
자기 잘난 체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거드름을 한껏 피우고, 거짓에 능하며, 자기 꾀에 넘어진다. 악한 계략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9절이다. “②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 / ②’어리석은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빌림’은 잠언 전체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킴. 단순히 ‘둔한 사람’과 구별됨(새번역)”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고 정한 “속죄 제사”를 우습게 여긴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이 비뚤어지고 멀리 멀리 떠난 삶”의 단적인 증거가 예배 생활에 대한 태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는 거절하고 내가 추구하고 탐욕하는 길에만 집중하는 삶의 태도라 할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과 관계의 바로미터인 “예배”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인생을 세우는 사람인지, 허무는 사람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좌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그에게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시간보다, 내 자신이 추구하는 만족과 유익을 위해 이것에서 “비뚤어지고 떠나 버린” 태도와 마음이 깨달아 진다면 속히 돌아서야 한다.
*자신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기 전에 다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다시 세워지고”, “생명의 길”로 돌아올 수 있다.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이 “지혜로움과 정직함”으로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세우는 삶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 하는 데서 힘과 능력이 나온다. 하나님에게서 “세움”의 은혜와 능력이 공급된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다고 세상 따라 망하는 길, 허물어뜨리는 길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거짓과 교만과 자기애에 집착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틀고 스스로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 그분 앞에 나의 삶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의 특권을 스스로 걷어차면 안 된다.
-예배를 통해 나를 만나 주시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내밀히 교제해 주시는 특권을 “비틀면” 안 된다. 사역과 봉사를 통해 활력을 주시는 기쁨을 등한시 하면 안 된다. 특히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사죄의 한량없는 감격과 은혜를 스스로 걷어차는 “비뚤어짐과 떠남”은 결코 빠지지 말아야 할 길이다.
-나는 세우는 사람일까? 허무는 사람일까? 내 자신 뿐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강한 공동체로 세우는 사람일까?
-세우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세워진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지혜로 세워진 사람이 집과 공동체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세울 수 있다. 철저하게 “본”을 보임으로 세운다. 번지르한 속빈 강정처럼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외함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게 살기 위해 “지혜를 찾고, 듣고, 가르침(훈계)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
-나도 솔로몬이 당부한 그 지혜자의 삶, 곧 세우는 사람으로 살아내기를 오늘도 결심해 본다.
**주님, 세우는 사람 되도록 더욱 주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 지혜로움과 정직함으로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이것이 나를 세우고 집을 세우며 공동체를 세워지게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