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그의 마음따라 살아가려는 행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의식하는 삶은 일상에서 그 공의로움을 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일상에서 드러나야 할 공의로움은 무엇일까?
1.공정한 재판(23-25절)
세상에서 가장 공정해야 할 곳이 법정이다. 사회의 건강도는 얼마나 공정한 재판인지에 달렸다. 재판 앞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된다. 공정하고 바른 재판을 통해 범죄의 올바른 판단 뿐 아니라 행여 악한 일을 의도하는 자들에게 엄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범죄의 유혹이 억제된다.
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거나 “학연과 혈연”에(23절) 따른 판단이 일어나면 “공정성”의 심각한 훼손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치우친 재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갚으시겠다고 경고하신다(24절). 세상 법정에서는 어물쩍 넘어가서 요행이라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어림 없다.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서 저주를 받고, 뭇 민족에게서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을 꾸짖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며, 좋은 복도 받을 것이다.(새번역_24-25절)”
이 사실을 인식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판관은 더욱 공정하게 재판에 임해야 한다. 사회를 공정하게 세우는 것은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과 바른 판결”이 근간이다. 우리나라의 사법기관이 제발 이랬으면 좋겠다.
2.바른 말, 바른 행동(26-29절)
참된 우정의 중심에는 ‘바른 말’이 있다(26절). 친구라 하여 잘못된 행동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가정을 책임지는 것(27절)도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지혜로운 자들의 모습이다.
또, 까닭 없이 이웃을 무고하거나, 속여서도 안 된다(28절).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자의 조언은 당시 고대사회에서 용인되었던 “동해복수”조차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말로 라도”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너는 “그가 나에게 한 그대로 나도 그에게 하여, 그가 나에게 한 만큼 갚아 주겠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새번역_29절)”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강조하면서 거짓 증언, 속이는 말, 보복과 저주의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일상에서 늘 이 두 가지 말이 혼존 하는 것을 본다. 바른 말과 악한 말이 뒤섞여 있다. 저주와 보복의 말들이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여과 없이 오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사회가 점점 악한 말에 옭아 메이는 느낌이다.
*특히 ‘욕’이 일상 언어가 된 다음세대의 언어가 심히 걱정이 된다. 험한 말과 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입술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언어 습관을 따라야겠다.
*용서, 사랑, 긍휼, 인자하신 주님의 말을 따라, 나의 말에도 역시 이런 말이 나오도록 힘써야지…
*한편으로 꼭 필요한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아야지… 친한 관계 일수록 살리고 세우는 “바른 말”을 주저하지 말아야지…
3.성실한 부지런함(30-34절)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게으르고 지각(지혜) 없는 이의 엉망이 된 포도원을 바라보며 지혜자는 그것 만으로도 “생각이 깊어지고, 교훈을 받았다”(32절)고 고백한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깨달은 분명한 교훈을 이렇게 남긴다.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①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 / ①또는 ‘거지처럼'(새번역_33-34절)”
설명할 게 무엇이 있겠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한다면 땀흘림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게으른 자, 지혜(지각) 없는 자”는(30절) 자신의 삶을 방치한다. 자신의 삶을 뒤덮는 ‘가시덤불’을 치우려고 하지 않는다. 몹쓸 땅으로 만드는 엉겅퀴를 걷어 내지 않는다.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고, 들짐승들의 노략을 막는 돌담이 무너져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조그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조그만 더 누워있을께”라며 “방치”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상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보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삶이다. 지혜자는 이런 방치과 태만이 가져오는 이웃의 삶을 바라보면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받아서”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일상에서의 “방치와 태만”이 가져오는 “게으름”은 “가난이 강도처럼, 빈곤(곤핍)이 군사처럼” 이르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를 보고 깨달아서 “성실하고 부지런히” 산다.
*영적인 것도 동일하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영적 게으름에 방치하고, 이 정도 쯤은 괜찮을 거야 라며 태만히 여기는 이는 예상 못한 순간에, 강도처럼, 군사처럼 영적 빈궁과 곤핍이 밀려 온다.
*일상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나님과 함께 하면, 영적 게으름이 몰고 오는 강도와 군사 같은 영적 침체와 가난함이 나를 쓰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사법기관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해야 겠다. 어떤 나라보다 공정한 재판을 해내는 대한민국 사법기관이 되도록…
-요즘 주님의 언어를 따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언어가 나의 입술의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주님의 언어가 나의 언어가 되게 해 주십시오.
-또, 바른 말, 바른 행동은 나부터 더욱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바른 말은 듣기에 즐겁고 좋은 말이기도 하겠지만, 거북스럽고 민망한 말일 수도 있겠다. 사랑할 수록 “거북스럽고 민망한 바른 말이 마음 상하지 않고 들려지도록” 언어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도 느끼게 된다. 아…. 말하는 것.. 참 어렵다…. 그럼에도 진실하게, 주저함 없이, 배려하며 바른 말 하는 것을 늘 훈련해야 겠지?…..
-방치와 태만은 특히 현재의 영적인 상황과 맞물려 도전이 된다. 코로나 상황은 신앙의 영역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행동하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고 있다. 여기에 휩쓸려 신앙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하는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것이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 더욱 긴장되게 하는 깨달음이다.
-감사하게도 더온누리공동체에는 예배를 사모하여 나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모습이 꾸준하다. 방역기준에 따라 현장 예배를 드리는 한 분 한 분이 그렇게 감사하다. 외적인 모습 뿐 아니라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게 주시는 은혜로 넘쳐나기를 소망해 본다.
-공정, 바른 말과 행동, 부지런함…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이런 행실을 보시며 나를 판단하실 것을 알기에 경외함으로 순종해야 하리라…
*주님, 공정한 대한민국 법정이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바른 말, 바른 행동의 가치가 저에게도 다음세대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깨닫고 받아들이게 해 주십시오.
*주님, 방치하고 태만한 게으름이 저를 덮지 않도록 더욱 성실하고 부지런한 하루 되게 해 주십시오. 마땅히 해야 할 주님의 일을 더욱 집중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채워가게 해 주십시오.
1.공정한 재판(23-25절)
세상에서 가장 공정해야 할 곳이 법정이다. 사회의 건강도는 얼마나 공정한 재판인지에 달렸다. 재판 앞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된다. 공정하고 바른 재판을 통해 범죄의 올바른 판단 뿐 아니라 행여 악한 일을 의도하는 자들에게 엄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범죄의 유혹이 억제된다.
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거나 “학연과 혈연”에(23절) 따른 판단이 일어나면 “공정성”의 심각한 훼손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치우친 재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갚으시겠다고 경고하신다(24절). 세상 법정에서는 어물쩍 넘어가서 요행이라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어림 없다.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서 저주를 받고, 뭇 민족에게서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을 꾸짖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며, 좋은 복도 받을 것이다.(새번역_24-25절)”
이 사실을 인식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판관은 더욱 공정하게 재판에 임해야 한다. 사회를 공정하게 세우는 것은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과 바른 판결”이 근간이다. 우리나라의 사법기관이 제발 이랬으면 좋겠다.
2.바른 말, 바른 행동(26-29절)
참된 우정의 중심에는 ‘바른 말’이 있다(26절). 친구라 하여 잘못된 행동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가정을 책임지는 것(27절)도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지혜로운 자들의 모습이다.
또, 까닭 없이 이웃을 무고하거나, 속여서도 안 된다(28절).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자의 조언은 당시 고대사회에서 용인되었던 “동해복수”조차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 “말로 라도”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너는 “그가 나에게 한 그대로 나도 그에게 하여, 그가 나에게 한 만큼 갚아 주겠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새번역_29절)”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강조하면서 거짓 증언, 속이는 말, 보복과 저주의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일상에서 늘 이 두 가지 말이 혼존 하는 것을 본다. 바른 말과 악한 말이 뒤섞여 있다. 저주와 보복의 말들이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여과 없이 오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사회가 점점 악한 말에 옭아 메이는 느낌이다.
*특히 ‘욕’이 일상 언어가 된 다음세대의 언어가 심히 걱정이 된다. 험한 말과 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입술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언어 습관을 따라야겠다.
*용서, 사랑, 긍휼, 인자하신 주님의 말을 따라, 나의 말에도 역시 이런 말이 나오도록 힘써야지…
*한편으로 꼭 필요한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아야지… 친한 관계 일수록 살리고 세우는 “바른 말”을 주저하지 말아야지…
3.성실한 부지런함(30-34절)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게으르고 지각(지혜) 없는 이의 엉망이 된 포도원을 바라보며 지혜자는 그것 만으로도 “생각이 깊어지고, 교훈을 받았다”(32절)고 고백한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깨달은 분명한 교훈을 이렇게 남긴다.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①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 / ①또는 ‘거지처럼'(새번역_33-34절)”
설명할 게 무엇이 있겠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한다면 땀흘림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게으른 자, 지혜(지각) 없는 자”는(30절) 자신의 삶을 방치한다. 자신의 삶을 뒤덮는 ‘가시덤불’을 치우려고 하지 않는다. 몹쓸 땅으로 만드는 엉겅퀴를 걷어 내지 않는다.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고, 들짐승들의 노략을 막는 돌담이 무너져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조그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조그만 더 누워있을께”라며 “방치”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상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보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삶이다. 지혜자는 이런 방치과 태만이 가져오는 이웃의 삶을 바라보면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받아서”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일상에서의 “방치와 태만”이 가져오는 “게으름”은 “가난이 강도처럼, 빈곤(곤핍)이 군사처럼” 이르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를 보고 깨달아서 “성실하고 부지런히” 산다.
*영적인 것도 동일하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영적 게으름에 방치하고, 이 정도 쯤은 괜찮을 거야 라며 태만히 여기는 이는 예상 못한 순간에, 강도처럼, 군사처럼 영적 빈궁과 곤핍이 밀려 온다.
*일상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나님과 함께 하면, 영적 게으름이 몰고 오는 강도와 군사 같은 영적 침체와 가난함이 나를 쓰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사법기관을 위해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해야 겠다. 어떤 나라보다 공정한 재판을 해내는 대한민국 사법기관이 되도록…
-요즘 주님의 언어를 따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언어가 나의 입술의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주님의 언어가 나의 언어가 되게 해 주십시오.
-또, 바른 말, 바른 행동은 나부터 더욱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바른 말은 듣기에 즐겁고 좋은 말이기도 하겠지만, 거북스럽고 민망한 말일 수도 있겠다. 사랑할 수록 “거북스럽고 민망한 바른 말이 마음 상하지 않고 들려지도록” 언어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도 느끼게 된다. 아…. 말하는 것.. 참 어렵다…. 그럼에도 진실하게, 주저함 없이, 배려하며 바른 말 하는 것을 늘 훈련해야 겠지?…..
-방치와 태만은 특히 현재의 영적인 상황과 맞물려 도전이 된다. 코로나 상황은 신앙의 영역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행동하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고 있다. 여기에 휩쓸려 신앙을 방치하고 태만하게 하는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것이 나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 더욱 긴장되게 하는 깨달음이다.
-감사하게도 더온누리공동체에는 예배를 사모하여 나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모습이 꾸준하다. 방역기준에 따라 현장 예배를 드리는 한 분 한 분이 그렇게 감사하다. 외적인 모습 뿐 아니라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게 주시는 은혜로 넘쳐나기를 소망해 본다.
-공정, 바른 말과 행동, 부지런함…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이런 행실을 보시며 나를 판단하실 것을 알기에 경외함으로 순종해야 하리라…
*주님, 공정한 대한민국 법정이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바른 말, 바른 행동의 가치가 저에게도 다음세대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깨닫고 받아들이게 해 주십시오.
*주님, 방치하고 태만한 게으름이 저를 덮지 않도록 더욱 성실하고 부지런한 하루 되게 해 주십시오. 마땅히 해야 할 주님의 일을 더욱 집중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채워가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