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7:1-21 구별된 영역, 늘 켜있는 등불처럼(놋 제단, 울타리, 등잔불)
성막의 뜰 안에 있는 놋 제단(1-8절)과 뜰 사방에 설치할 울타리 포장들과 출입문 설치에 관련하여(9-19절) 말씀하셨고, 등잔대에 공급할 순수한 감람유에 대한 규례도(20-21절) 가르치셨다. 지성소와 성소 안에 놓아 둘 법궤와 진설병 상, 등잔대, 성막을 지탱하는 널판지와 포장들을 설명하시고 성막 뜰에 설치할 놋 제단과 울타리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1.제단(번제단_1-8절)
역시 “네게 보인 대로(8절)” 그대로 만들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적어도 모세는 그 모양이 어떠한지 분명히 보았다. 단지 설명된 것 만으로 스케치 조차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먼저 본 것을 그대로 스케치 해주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규격대로, 모양대로 만들면 될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꼐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와서 감사할 일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확신하여 전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에도, 까닭없이 괴롭히는 조롱과 핍박을 견딜 수 있다. “진짜를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신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된다!
제단은 “조각목(싯딤_광야 아카시아 나무)”과 “놋”을 재료로 하여 제작했다. 크기는 가로 2.25m, 세로 2.25m, 높이 1.35m의 정사각형 구조였다. 특징적인 것은 이동이 가능하도록 ‘고리’를 만들었다. 싯딤 나무는 가시가 있는 아카시아 나무였다.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최상급 장례용품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썩지 않고 오래가는 나무판에 놋쇠를 싸서 제물을 불에 태울 때 견디게 하였다.
하지만 영구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양식대로 제사를 드리면서 닳아진 제단은 다시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리 놋으로 입혔어도 자주 사용하다보면 분명 닳았을테니…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금이나 은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놋을 재료로 사용한 점과, 아무래도 이동해야 할 성막이었으니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조각목으로 짜고 놋을 입히라는 명령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형식이 어쨌든지 제단은 백성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성막 뜰안은 언제나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기쁨과 인간의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죽어가는 제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깊은 슬픔과 홀가분한 기쁨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장소였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하는 무거운 고통과 슬픔은 곧 온 인류가 받아 누리게 될 구원의 기쁨의 시작이었다. 큰 고통이 큰 자유함의 기쁨을 가져왔다. 예수님의 죽음의 슬픔이 우리의 새생명의 환희로 나타났다.
2.울타리(9-19절)
성막의 울타리는 세마포 휘장으로 만들어졌는데, 가로 50m, 세로25m 규모였다. 동편에 사람과 제물이 출입하는 문이 하나 있다. 동쪽 문을 통해 성막에 들어오면 서쪽을 향해 일렬로 번제단과 물두멍과 성막이 차례로 위치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계산하면 성막의 면적은 약 500 제곱미터이다. (약 151평 정도)… 그리 크지 않다.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생각하면 암담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하니님은 크신 분이시다. 마땅히 구별되어 할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성막은 가장 큰 건물이었다. 광야의 길을 가는 도중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마누엘의 자비와 은혜를 실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오직 동쪽으로만 나 있는 문을 통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다.
울타리는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될 분명한 표지 이지만, 동쪽으로 유일하게 난 입구를 통해서는 “오직 이 문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희망을 가졌다. 또 유일하게 난 동쪽 문을 통해 제물을 들여 번제단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 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울타리는 단절을 상징한다. 동편에 문이 하나 있었을 뿐 모두 막힌 공간이다. 유일하게 난 동편 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다.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구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당연히 세상 논리와 경험, 가치와 판단으로 똑같이 바라볼 수 없다. 다르다! 확연한 다름을 울타리가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구별”이 있을까? 내가 세상과 다른 구별된 점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영역”이다. 어떤 다른 영역.. 영적인 울타리가 둘러 있는 “영역”이 있으면 그 영역에서 흘러 나오는 거룩한 힘으로 세상과 다른 삶을 드러내며 살 수 있다.
*성경은 그 곳을 “마음”이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출애굽)과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들(만나, 구름기둥, 불기둥, 성막)을 기억하며 어떤 것보다 “마음”을 힘써 지키라고 당부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또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힘써 지켜라(잠 4:4, 23)”고 당부했다.
*나의 마음에 성령께서 오셨다. “마음”이 곧 세상과 다른 나의 거룩의 영역인 것이다. 내 마음에 세상의 다른 것들이 쉽게 침범하지 않도록 성령님이 마음의 문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아무것도 임의로 들어와 활개치지 않도록 성령께서 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해야지…
3.등잔(20-21절)
성소의 등잔에 불을 “늘” 켜두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새번역_20절).”
등잔대 자체가 완전한 빛, 꺼지지 않는 영원 불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늘” 켜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의 맥락을 따라 이렇게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빛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요 8:12). 즉, 성도는 주님으로 부터 받은 “생명의 빛”을 “늘” 켜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어 “늘”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한다.
또, 예수님은 이런 제자의 삶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새번역_마 5:14).” 빛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 말을 단단히 마음으로 지키면 자연스레 “늘” 빛을 발한다. 어둠의 세상에서 “그린라이트”가 된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영역이 있어야 한다. 세상 가치와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 세상 논리와 확연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섬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만능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순전함의 영역이 살아 있어야 한다.
-세상과 구별된 시간, 장소… 바로 외적으로는 교회와 예배이고 내적으로는 마음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교제하는 건강한 신앙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을 머금고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출 수 있다. 하나님과 만나고 산을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발하는 광채가 너무 빛나서 백성들이 수건을 씌운 것 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세상이 알아보기 마련이다.
-놋 제단, 성막의 울타리, 등잔의 불을 늘 켜두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길은 오직 동편으로 난 문으로만 가능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놋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자유하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대신 죄의 제물로 죽어간 짐승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나의 죄사함의 은혜의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전의 뜰 안에서는 오늘날도 구원의 자유함과 죄 문제의 엄중함이 함께 교차한다. 그곳에서 생명의 빛은 “늘” 켜져 있어 그 빛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이기를 갈망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는 교회,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늘” 선포되고, 그 말씀이 빛이 되어 어두운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주는 교회, 빛된 예수님의 행실을 따라 순종하여 어두운 세상 속에서 그린라이트를 비춰 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
-이런 교회이어라….
*주님, 거룩함의 영역, 나의 마음을 더욱 잘 지키게습니다.
*주님, 나의 빛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빛 잘 전달하며 살겠습니다. 잘 비추겠습니다.
*주님, 말씀이 빛이 되어 나의 생각과 결정을 붙잡아 주시고, 말씀의 빛을 “늘” 켜두는 삶이 되겠습니다!
성막의 뜰 안에 있는 놋 제단(1-8절)과 뜰 사방에 설치할 울타리 포장들과 출입문 설치에 관련하여(9-19절) 말씀하셨고, 등잔대에 공급할 순수한 감람유에 대한 규례도(20-21절) 가르치셨다. 지성소와 성소 안에 놓아 둘 법궤와 진설병 상, 등잔대, 성막을 지탱하는 널판지와 포장들을 설명하시고 성막 뜰에 설치할 놋 제단과 울타리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1.제단(번제단_1-8절)
역시 “네게 보인 대로(8절)” 그대로 만들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적어도 모세는 그 모양이 어떠한지 분명히 보았다. 단지 설명된 것 만으로 스케치 조차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먼저 본 것을 그대로 스케치 해주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규격대로, 모양대로 만들면 될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꼐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와서 감사할 일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확신하여 전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에도, 까닭없이 괴롭히는 조롱과 핍박을 견딜 수 있다. “진짜를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신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된다!
제단은 “조각목(싯딤_광야 아카시아 나무)”과 “놋”을 재료로 하여 제작했다. 크기는 가로 2.25m, 세로 2.25m, 높이 1.35m의 정사각형 구조였다. 특징적인 것은 이동이 가능하도록 ‘고리’를 만들었다. 싯딤 나무는 가시가 있는 아카시아 나무였다.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최상급 장례용품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썩지 않고 오래가는 나무판에 놋쇠를 싸서 제물을 불에 태울 때 견디게 하였다.
하지만 영구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양식대로 제사를 드리면서 닳아진 제단은 다시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리 놋으로 입혔어도 자주 사용하다보면 분명 닳았을테니…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금이나 은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놋을 재료로 사용한 점과, 아무래도 이동해야 할 성막이었으니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조각목으로 짜고 놋을 입히라는 명령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형식이 어쨌든지 제단은 백성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룩한 장소”였다. 성막 뜰안은 언제나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기쁨과 인간의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죽어가는 제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깊은 슬픔과 홀가분한 기쁨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장소였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하는 무거운 고통과 슬픔은 곧 온 인류가 받아 누리게 될 구원의 기쁨의 시작이었다. 큰 고통이 큰 자유함의 기쁨을 가져왔다. 예수님의 죽음의 슬픔이 우리의 새생명의 환희로 나타났다.
2.울타리(9-19절)
성막의 울타리는 세마포 휘장으로 만들어졌는데, 가로 50m, 세로25m 규모였다. 동편에 사람과 제물이 출입하는 문이 하나 있다. 동쪽 문을 통해 성막에 들어오면 서쪽을 향해 일렬로 번제단과 물두멍과 성막이 차례로 위치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계산하면 성막의 면적은 약 500 제곱미터이다. (약 151평 정도)… 그리 크지 않다.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생각하면 암담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하니님은 크신 분이시다. 마땅히 구별되어 할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성막은 가장 큰 건물이었다. 광야의 길을 가는 도중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마누엘의 자비와 은혜를 실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오직 동쪽으로만 나 있는 문을 통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다.
울타리는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될 분명한 표지 이지만, 동쪽으로 유일하게 난 입구를 통해서는 “오직 이 문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희망을 가졌다. 또 유일하게 난 동쪽 문을 통해 제물을 들여 번제단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길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 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울타리는 단절을 상징한다. 동편에 문이 하나 있었을 뿐 모두 막힌 공간이다. 유일하게 난 동편 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다.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구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당연히 세상 논리와 경험, 가치와 판단으로 똑같이 바라볼 수 없다. 다르다! 확연한 다름을 울타리가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구별”이 있을까? 내가 세상과 다른 구별된 점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영역”이다. 어떤 다른 영역.. 영적인 울타리가 둘러 있는 “영역”이 있으면 그 영역에서 흘러 나오는 거룩한 힘으로 세상과 다른 삶을 드러내며 살 수 있다.
*성경은 그 곳을 “마음”이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출애굽)과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들(만나, 구름기둥, 불기둥, 성막)을 기억하며 어떤 것보다 “마음”을 힘써 지키라고 당부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또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힘써 지켜라(잠 4:4, 23)”고 당부했다.
*나의 마음에 성령께서 오셨다. “마음”이 곧 세상과 다른 나의 거룩의 영역인 것이다. 내 마음에 세상의 다른 것들이 쉽게 침범하지 않도록 성령님이 마음의 문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아무것도 임의로 들어와 활개치지 않도록 성령께서 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해야지…
3.등잔(20-21절)
성소의 등잔에 불을 “늘” 켜두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새번역_20절).”
등잔대 자체가 완전한 빛, 꺼지지 않는 영원 불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늘” 켜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말씀의 맥락을 따라 이렇게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빛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요 8:12). 즉, 성도는 주님으로 부터 받은 “생명의 빛”을 “늘” 켜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어 “늘”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한다.
또, 예수님은 이런 제자의 삶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새번역_마 5:14).” 빛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 말을 단단히 마음으로 지키면 자연스레 “늘” 빛을 발한다. 어둠의 세상에서 “그린라이트”가 된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영역이 있어야 한다. 세상 가치와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 세상 논리와 확연히 다른 하나님 나라의 섬김,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만능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순전함의 영역이 살아 있어야 한다.
-세상과 구별된 시간, 장소… 바로 외적으로는 교회와 예배이고 내적으로는 마음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교제하는 건강한 신앙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을 머금고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출 수 있다. 하나님과 만나고 산을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발하는 광채가 너무 빛나서 백성들이 수건을 씌운 것 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세상이 알아보기 마련이다.
-놋 제단, 성막의 울타리, 등잔의 불을 늘 켜두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길은 오직 동편으로 난 문으로만 가능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놋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자유하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대신 죄의 제물로 죽어간 짐승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나의 죄사함의 은혜의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전의 뜰 안에서는 오늘날도 구원의 자유함과 죄 문제의 엄중함이 함께 교차한다. 그곳에서 생명의 빛은 “늘” 켜져 있어 그 빛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교회이기를 갈망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는 교회,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늘” 선포되고, 그 말씀이 빛이 되어 어두운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주는 교회, 빛된 예수님의 행실을 따라 순종하여 어두운 세상 속에서 그린라이트를 비춰 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
-이런 교회이어라….
*주님, 거룩함의 영역, 나의 마음을 더욱 잘 지키게습니다.
*주님, 나의 빛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빛 잘 전달하며 살겠습니다. 잘 비추겠습니다.
*주님, 말씀이 빛이 되어 나의 생각과 결정을 붙잡아 주시고, 말씀의 빛을 “늘” 켜두는 삶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