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5:22-27 쓴 물이 단 물로!
홍해 예배의 감격을 간직한 채 사흘 길을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다. 이성적인 추론을 하자면 모세는 40여년전, 그리고 6개월여 전에 미디안 광야를 오간 그 길을 되짚어서 광야로 들어갔을 것이다. 모세의 기억은 틀림없었을 터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모세의 관록과 왕래 했던 길의 기억은 자신감있게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 했을 것이다. 익숙하지는 않았겠지만 한 두번 왕래 하였던 그 길에서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물이 떨어져 가는데, 물을 찾지 못했다. 비축하고 있던 물은 사흘 길을 걸어 가는 동안 금새 떨어졌을 것이다.
당황한 것은 모세… 사흘이 되어도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물이 떨어진 백성들의 목마름에서 나오는 불평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마라(쓰다, 쓴 맛이 나다)”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쓴 물(짠 물)”이었다. 백성들은 참고 있던 원망을 터뜨렸다(24절).
*마라는 ‘쓰다’라는 뜻으로 맛이 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인생이 괴로울 때도 사용된 단어이다. 룻기의 나오미가 하나님이 자신을 심히 괴롭게 하셨기에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다(룻 1:20). 쓴 물은 물 없는 광야를 헤매는 괴로운 이스라엘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광야” 가운데 마실 물이 없는 쓰디 쓴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씁쓸하기 그지 없는 상황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반응, 모세의 행동(25절)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다!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졌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물이 달아진 것이다! 물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했고, 목적은 “법도와 율례를(규칙을) 정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었다. 야훼께서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그들을 시험해 보셨다.(공동번역_25절)”
*”가리키다”라는 단어는 “요레후”이다. “보여 주다. 가르쳐 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쓴 물을 변화 시키기 위해 한 나무를 지정하고 이를 모세에게 알려 주셨다는 의미다. 어떤 특정한 나무 성분이 정화 혹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나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리킨 나무”, “알려주신 나무”를 믿음으로 샘에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기적은 나무 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직역한 대로 본문을 생각해 보면,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어떤 나무를 가리키시기만 했다면, 즉 말씀해 주지 않으시고 “가리켜 보여 주시기만 했는데 나무를 던지는 순종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당치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아온 경험의 한계 내에서도 “마실 수 없는 물”은 그저 마시지 못하는 것이었다. 절대 마시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실 수 없는 쓴 물 앞에서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 앞에 서 있는 모세의 시선을 “어떤 나무”에 고정 시키신 것이다. “저 나무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런 혼돈, 망설임, 계산….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을 접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가리키는)” 나무를 던지기 까지…모세가 가장 큰 믿음의 도전을 넘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도전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뛰어 넘고 있다…. 마침내 그렇게 던진 나무가지로 인해 쓴 물은 마실 수 있는 단 물이 되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가장 놀란 것은 모세였을 것이다. 사실 출애굽의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직접적으로 “현타” 오도록 절감한 사람은 매번 모세였다. 자신에게 선포하게 하신 대로 행하시는(이루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할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을 통과해 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유일하게 왕래 해본 길… 어디쯤 가면 물이 있을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였다.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 체득한 물길을 찾는 것도 알고 있을 그였다. 그런데 지난 3일 길은 이런 경험치가 도무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 답답한 시간들 이었다.
마침내 다다른 “마라”에서 ‘쓴 물’에 대한 실망은 백성들의 원망이기도 하지만 모세의 당혹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가리켜 주신” 어떤 나무…그것을 물에 던지는 용기…모세 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한계를 한 차원 뛰어 넘는 놀라운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맛 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 일은 “시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한 율례와 법도(규칙)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칙(26절)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칙은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새번역_26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규칙이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다. “너 이스라엘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그가 보기에 바르게 살며 그 명령을 귀에 담아 모든 규칙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어떤 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야훼,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공동번역_26절)
*”듣다(샤오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태도”이다. “바르게(의_야샤르)” 행한다는 단어의 의미는 “똑바른”이라는 뜻이다. 의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데에는 “똑바로(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행동으로 옮기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할, 똑바로 행하여야 할 것”으로 듣고 행하는(순종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순종이다. 이를 잘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해 주실 것을 들려 주신다.
*이 규칙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홍해 예배의 감격 직후 광야 사흘 동안 시험하셨다. 이 시험은 ‘유혹’이나 ‘시련’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학습을 위한 “훈련”이었다.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쓴 물을 단 물로 바꿔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여호와 라파)”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삶은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다. 한 평생 적지 않은 쓴 맛을 보며 산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죄로 인한 쓴 맛이 끊임없이 “마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라 사건은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대로만 살아가면 쓴물을 만날 때에 단물을 마실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 그 쓰디 쓴 물의 범람 속에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단 물이 쓴 물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대로 단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신다.
*예수님이 인생의 쓴 물 속에 내가 마시는 생수(단물) 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고난을 만나더라도 결코 쓰지만은 않다. 고난이 유익하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무엇을 마실까에 함몰되어 완전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잊어버린다.
나는?
-“마라”와 같은 쓰디 쓴 물밖에 없는 때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쓴 물만 있는 인생은 없다. 출애굽이 그랬고, 홍해도하가 그랬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늘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 쓰디 쓴 마라를 만날 때 가장 쓰라린 것은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저 “무엇을 마실까?”만 생각하고 불평하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인생사의 문제는 걱정, 근심이 아니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주님, 마라와 같은 쓰디 쓴 인생의 때를 만나도 단물을 주시고 엘림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똑바로(올바르게) 순종하겠습니다.
홍해 예배의 감격을 간직한 채 사흘 길을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다. 이성적인 추론을 하자면 모세는 40여년전, 그리고 6개월여 전에 미디안 광야를 오간 그 길을 되짚어서 광야로 들어갔을 것이다. 모세의 기억은 틀림없었을 터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모세의 관록과 왕래 했던 길의 기억은 자신감있게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 했을 것이다. 익숙하지는 않았겠지만 한 두번 왕래 하였던 그 길에서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물이 떨어져 가는데, 물을 찾지 못했다. 비축하고 있던 물은 사흘 길을 걸어 가는 동안 금새 떨어졌을 것이다.
당황한 것은 모세… 사흘이 되어도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물이 떨어진 백성들의 목마름에서 나오는 불평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마라(쓰다, 쓴 맛이 나다)”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쓴 물(짠 물)”이었다. 백성들은 참고 있던 원망을 터뜨렸다(24절).
*마라는 ‘쓰다’라는 뜻으로 맛이 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인생이 괴로울 때도 사용된 단어이다. 룻기의 나오미가 하나님이 자신을 심히 괴롭게 하셨기에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다(룻 1:20). 쓴 물은 물 없는 광야를 헤매는 괴로운 이스라엘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광야” 가운데 마실 물이 없는 쓰디 쓴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씁쓸하기 그지 없는 상황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반응, 모세의 행동(25절)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다!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졌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물이 달아진 것이다! 물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했고, 목적은 “법도와 율례를(규칙을) 정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었다. 야훼께서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그들을 시험해 보셨다.(공동번역_25절)”
*”가리키다”라는 단어는 “요레후”이다. “보여 주다. 가르쳐 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쓴 물을 변화 시키기 위해 한 나무를 지정하고 이를 모세에게 알려 주셨다는 의미다. 어떤 특정한 나무 성분이 정화 혹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나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리킨 나무”, “알려주신 나무”를 믿음으로 샘에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기적은 나무 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직역한 대로 본문을 생각해 보면,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어떤 나무를 가리키시기만 했다면, 즉 말씀해 주지 않으시고 “가리켜 보여 주시기만 했는데 나무를 던지는 순종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당치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아온 경험의 한계 내에서도 “마실 수 없는 물”은 그저 마시지 못하는 것이었다. 절대 마시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실 수 없는 쓴 물 앞에서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 앞에 서 있는 모세의 시선을 “어떤 나무”에 고정 시키신 것이다. “저 나무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런 혼돈, 망설임, 계산….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을 접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가리키는)” 나무를 던지기 까지…모세가 가장 큰 믿음의 도전을 넘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도전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뛰어 넘고 있다…. 마침내 그렇게 던진 나무가지로 인해 쓴 물은 마실 수 있는 단 물이 되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가장 놀란 것은 모세였을 것이다. 사실 출애굽의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직접적으로 “현타” 오도록 절감한 사람은 매번 모세였다. 자신에게 선포하게 하신 대로 행하시는(이루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할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을 통과해 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유일하게 왕래 해본 길… 어디쯤 가면 물이 있을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였다.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 체득한 물길을 찾는 것도 알고 있을 그였다. 그런데 지난 3일 길은 이런 경험치가 도무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 답답한 시간들 이었다.
마침내 다다른 “마라”에서 ‘쓴 물’에 대한 실망은 백성들의 원망이기도 하지만 모세의 당혹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가리켜 주신” 어떤 나무…그것을 물에 던지는 용기…모세 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한계를 한 차원 뛰어 넘는 놀라운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맛 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 일은 “시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한 율례와 법도(규칙)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칙(26절)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칙은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새번역_26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규칙이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다. “너 이스라엘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그가 보기에 바르게 살며 그 명령을 귀에 담아 모든 규칙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어떤 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야훼,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공동번역_26절)
*”듣다(샤오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태도”이다. “바르게(의_야샤르)” 행한다는 단어의 의미는 “똑바른”이라는 뜻이다. 의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데에는 “똑바로(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행동으로 옮기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할, 똑바로 행하여야 할 것”으로 듣고 행하는(순종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순종이다. 이를 잘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해 주실 것을 들려 주신다.
*이 규칙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홍해 예배의 감격 직후 광야 사흘 동안 시험하셨다. 이 시험은 ‘유혹’이나 ‘시련’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학습을 위한 “훈련”이었다.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쓴 물을 단 물로 바꿔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여호와 라파)”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삶은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다. 한 평생 적지 않은 쓴 맛을 보며 산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죄로 인한 쓴 맛이 끊임없이 “마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라 사건은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대로만 살아가면 쓴물을 만날 때에 단물을 마실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 그 쓰디 쓴 물의 범람 속에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단 물이 쓴 물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대로 단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신다.
*예수님이 인생의 쓴 물 속에 내가 마시는 생수(단물) 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고난을 만나더라도 결코 쓰지만은 않다. 고난이 유익하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무엇을 마실까에 함몰되어 완전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잊어버린다.
나는?
-“마라”와 같은 쓰디 쓴 물밖에 없는 때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쓴 물만 있는 인생은 없다. 출애굽이 그랬고, 홍해도하가 그랬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늘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 쓰디 쓴 마라를 만날 때 가장 쓰라린 것은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저 “무엇을 마실까?”만 생각하고 불평하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인생사의 문제는 걱정, 근심이 아니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주님, 마라와 같은 쓰디 쓴 인생의 때를 만나도 단물을 주시고 엘림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똑바로(올바르게) 순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