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10 성령의 방식대로 사는 삶은…
본문은 5:25절부터 한 단락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새번역_5:25)”. 이라고 청유(권면)하고 그런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성령의 방식, 주님의 말씀을 “깨우치시고 생각나게”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에는 분명 “죄성”을 따라 사는 삶과 다른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 모습인데, 성령의 열매가 맺힌 삶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른 복음을 전한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이들과 대립이 격화 되고 있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그 인도해주심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는 각각 자기 욕심과 주장,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다스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해석과 신학교리에 치우진 지체들을 대할 때 성령에 이끄심을 받는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1.바로잡아 주라(1절)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
“바로잡다(카타르티조)”는 단어는 “일부분을 바꾸거나 찢어지거나 깨진 것을 함께 이어서 회복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 흉터가 남을 수 있겠지만 “연결하고 붙여서” 다시 회복 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미 다른 복음으로 인해 마음이 찢겨지고 깨어 졌어도 다시 바른 복음으로 회복시켜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루어 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때, “온유한 심령”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침착하게” 바뀌고 찌어지고 깨진 것을 연결하고 붙여서 흉터가 남더라도 회복 시키라고 한다. 함부로 행하는 말과 행동으로가 아니라 “온유함(겸손함)”의 열매로 감당하라고 요청한다.
*바로잡는 것에 대한 선입견은 강압적이고 완력을 사용하여 행동하는 것으로만 오해한다. 세상은 그런 힘과 압제로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도해 주시는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온유함(겸손, 차분함, 부드러움)”을 가지고 힘과 압제가 아니라 섬김과 기다림, 인내와 사랑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범죄한 이들에 대한 성령의 방식은 마치 탈무드의 이야기 중 하나인 “태양과 바람의 내기”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것은 강하고 세찬 바람이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빛이었다. 범죄한 이들을 돕는 성령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유함으로 바로 잡아 주는 성령의 방식이다.
*공동체 지체들 가운데 간간히 들려오는 죄성에 타협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 정죄와 판단, 압제와 외면의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고 품어 그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2.서로 짐을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2, 5절)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새번역)”
“짐을 진다(바스타조)”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불쾌함이나 어려움을 견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락없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들의 죄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 그 십자가는 불쾌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무겁고, 고통스러우며, 심히 아프다). 그 어려운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이를 믿는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
이 원리로 이웃의 “불쾌함이나 어려운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성령의 방식에 순종하는 삶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이러한 모습을 통해 성취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을 흉내내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 지체의 불쾌하고 어려운 짐을 스스로 대신 져 주는 것, 그것은 2천년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 이곳에서 실현하는 일이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나의 힘이 되지 않으면 결코 순종할 수 없다.
*무거운 짐은 서로(함께)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
3.함께하라(6절)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새번역)”
“함께(코이노네오)”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것을 주거나 받는 것,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를 기억하고 우리도 서로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을 먼저 베풀고 나눌 때 “기쁨”의 은혜는 풍성해 진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관계로 국한 시킬 수도 있는 이 구절은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현재의 상태를 먼저 생각할 때 “모든 좋은 것”은 “바른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특히나 율법의 행위를 강조한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울이 가르친 복음에 대하여 의심이 일어나고 이에 대하여 신뢰가 깨진 것을 생각하면, “바른 복음과 이를 전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를 견고하게 하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바른 복음을 풍성하게 나누는 기쁨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복음에서 공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은 신비하기 그지 없다. 예수님때문에 공유되는 즐거움도 신비하기 그지 없다.
바른 복음의 은혜 안에서만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공유될 수 있는 기쁨, 은혜, 감격을 나누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예수님때문에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 자체만으로 성령께서는 “함께” 감동과 감격, 기쁨과 즐거움을 깨닫게하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
*바른 복음을 함께할 때 기쁨이 넘친다.
4.선한 일을 하라(9-10절)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새번역)”
“선함(아가도스)”은 기본적으로 “착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선함”에서 구원이 나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출애굽도, 포로귀환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의 선함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고 가르치며 믿음안에 거하도록 돕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이 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다른 복음으로 율법의 행위를 조건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간격을 만드는 것과 분명하게 비교가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으 ㅣ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원을 얻게 됨을 강조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한 일을 더욱 행하라는 말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권면함으로 바른 복음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도우라는 의미이다.
*선한 일은 착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착한 일보다 가장 탁월한 착한 일은 “선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허락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알리고 그 은혜 안에 거하며 살도록 돕는 일”이다. 다른 복음의 유혹이 공동체에게 위협이 될 때 바른 복음을 끝까지 지키고 그 안에 거하도록 돕는 일이다.
*바른 복음 안에 거하도록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하는” 일이 바로 선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생을 위해 죄성에 취해 있는 우리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바로잡아 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저주에 눌려있던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공동체 안에서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하는” 일을 낙심하지 말고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한 일은 바른 복음안에 거하도록 돕는 모든 일이다.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 거하는 일이다. 예수님처럼…
나는?
*주님, 바른 복음, 성령의 방식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공동체를 위해 바로잡고, 짐을 지며, 복음 안에 함께 거하도록 늘 선한 일에 힘쓰겠습니다.
*주님, 주님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감당해보겠습니다. 힘을 주십시오.
본문은 5:25절부터 한 단락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새번역_5:25)”. 이라고 청유(권면)하고 그런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성령의 방식, 주님의 말씀을 “깨우치시고 생각나게”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에는 분명 “죄성”을 따라 사는 삶과 다른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 모습인데, 성령의 열매가 맺힌 삶은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른 복음을 전한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이들과 대립이 격화 되고 있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그 인도해주심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는 각각 자기 욕심과 주장,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다스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해석과 신학교리에 치우진 지체들을 대할 때 성령에 이끄심을 받는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1.바로잡아 주라(1절)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
“바로잡다(카타르티조)”는 단어는 “일부분을 바꾸거나 찢어지거나 깨진 것을 함께 이어서 회복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 흉터가 남을 수 있겠지만 “연결하고 붙여서” 다시 회복 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미 다른 복음으로 인해 마음이 찢겨지고 깨어 졌어도 다시 바른 복음으로 회복시켜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루어 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때, “온유한 심령”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침착하게” 바뀌고 찌어지고 깨진 것을 연결하고 붙여서 흉터가 남더라도 회복 시키라고 한다. 함부로 행하는 말과 행동으로가 아니라 “온유함(겸손함)”의 열매로 감당하라고 요청한다.
*바로잡는 것에 대한 선입견은 강압적이고 완력을 사용하여 행동하는 것으로만 오해한다. 세상은 그런 힘과 압제로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도해 주시는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온유함(겸손, 차분함, 부드러움)”을 가지고 힘과 압제가 아니라 섬김과 기다림, 인내와 사랑으로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범죄한 이들에 대한 성령의 방식은 마치 탈무드의 이야기 중 하나인 “태양과 바람의 내기”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것은 강하고 세찬 바람이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빛이었다. 범죄한 이들을 돕는 성령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유함으로 바로 잡아 주는 성령의 방식이다.
*공동체 지체들 가운데 간간히 들려오는 죄성에 타협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 정죄와 판단, 압제와 외면의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고 품어 그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2.서로 짐을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2, 5절)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새번역)”
“짐을 진다(바스타조)”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불쾌함이나 어려움을 견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락없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들의 죄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 그 십자가는 불쾌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무겁고, 고통스러우며, 심히 아프다). 그 어려운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이를 믿는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
이 원리로 이웃의 “불쾌함이나 어려운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성령의 방식에 순종하는 삶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이러한 모습을 통해 성취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을 흉내내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 지체의 불쾌하고 어려운 짐을 스스로 대신 져 주는 것, 그것은 2천년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 이곳에서 실현하는 일이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나의 힘이 되지 않으면 결코 순종할 수 없다.
*무거운 짐은 서로(함께)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
3.함께하라(6절)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새번역)”
“함께(코이노네오)”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것을 주거나 받는 것,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를 기억하고 우리도 서로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을 먼저 베풀고 나눌 때 “기쁨”의 은혜는 풍성해 진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관계로 국한 시킬 수도 있는 이 구절은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현재의 상태를 먼저 생각할 때 “모든 좋은 것”은 “바른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특히나 율법의 행위를 강조한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울이 가르친 복음에 대하여 의심이 일어나고 이에 대하여 신뢰가 깨진 것을 생각하면, “바른 복음과 이를 전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를 견고하게 하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바른 복음을 풍성하게 나누는 기쁨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복음에서 공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은 신비하기 그지 없다. 예수님때문에 공유되는 즐거움도 신비하기 그지 없다.
바른 복음의 은혜 안에서만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공유될 수 있는 기쁨, 은혜, 감격을 나누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예수님때문에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 자체만으로 성령께서는 “함께” 감동과 감격, 기쁨과 즐거움을 깨닫게하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
*바른 복음을 함께할 때 기쁨이 넘친다.
4.선한 일을 하라(9-10절)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새번역)”
“선함(아가도스)”은 기본적으로 “착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선함”에서 구원이 나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출애굽도, 포로귀환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의 선함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고 가르치며 믿음안에 거하도록 돕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이 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다른 복음으로 율법의 행위를 조건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간격을 만드는 것과 분명하게 비교가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으 ㅣ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구원을 얻게 됨을 강조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한 일을 더욱 행하라는 말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권면함으로 바른 복음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도우라는 의미이다.
*선한 일은 착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착한 일보다 가장 탁월한 착한 일은 “선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허락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알리고 그 은혜 안에 거하며 살도록 돕는 일”이다. 다른 복음의 유혹이 공동체에게 위협이 될 때 바른 복음을 끝까지 지키고 그 안에 거하도록 돕는 일이다.
*바른 복음 안에 거하도록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하는” 일이 바로 선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생을 위해 죄성에 취해 있는 우리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바로잡아 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저주에 눌려있던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공동체 안에서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하는” 일을 낙심하지 말고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한 일은 바른 복음안에 거하도록 돕는 모든 일이다. ‘바로잡아 주고, 짐을 져주며, 복음 안에 함께” 거하는 일이다. 예수님처럼…
나는?
*주님, 바른 복음, 성령의 방식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공동체를 위해 바로잡고, 짐을 지며, 복음 안에 함께 거하도록 늘 선한 일에 힘쓰겠습니다.
*주님, 주님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감당해보겠습니다. 힘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