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인도해 주심을 따라 [갈5:16-26]
 – 2021년 09월 12일
– 2021년 09월 12일 –
갈 5:16-26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인도해 주심을 따라

바른 복음으로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직면해야 할 싸움이 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사이에서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한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가 드러난다. 정말 특이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의 일을 버리라”고도 명령하지 않았다. 단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을 통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육체의 일, 성령의 열매를 대조 나열하고서 진지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새번역_16절),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새번역_25절)”라는 명령과 권면(청유)이다.

또 본문에는 권면(청유)문이 한 구절 더 있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새번역_26절)” 이다. 잘난 체 하지 말고, 서로 노엽게 하지 말고, 질투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잘난 체나 노엽게 하지 말고 질투하지 않고 살아라고 부탁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잘난 체, 노엽게, 질투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직전까지 제자들을 향해 권면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누가 크냐의 문제”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한창 진지하게 말씀 하실 때 어이없게도 제자들이 던진 질문이 있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 18:1)”였다.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면, 우리 안에도 늘 인정받고 싶은 욕구, 높아지려는 욕망은 제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한 평판, 인정 욕구는 성령을 바라보기 보다 사람을 바라보게 만든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보다 인정받고 명예로워지는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예수님의 제자는 육체의 일을 피하려고 힘쓰는 것 보다, 성령의 열매를맺으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려고 힘을 써야 한다. 또 잘난 체 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서로 노엽게 하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한다.


왜 이렇게 살라는 것일까? 단순하다. 육체의 일을 피하고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 되기 위해서 이다. 즉, 나의 노력과 열정으로 육체의 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더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힐 수 있다고 확신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살 때 따라오는 것들이라는 거다. 육체의 행실을 행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라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을까? 16절을 살펴보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행한다(페리파테오)”는 히브리어로 “할라크”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말은 “성령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성령의 방식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라는 뜻이다.

성령의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성령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관련해서 버려야 할 인식이 있다.    바로 ‘은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산다는 것을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산다’는 것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또, 여러 은사로 살아간다는 것과 일치 시켜서도 안된다. 은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능일 뿐이다. 전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산다는 것은 삶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며 순간 순간 하나님께 물으며 산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말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서 하나님께 묻는다고만 한다면 결국 자신의 욕심과 탐욕에 얽매이게 될 수 밖에 없다. 즉,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고 싶은 것에만 함몰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에는 만드시 “말씀”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모른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성경 66권 안에 “주님께서 말씀 하신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지 않고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행동들을 단지 성령의 9가지 열매을 흉내내니까,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있으니까, 난 그렇게 살고 있어 자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은사대로 사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은사중심의 삶이 가져오는 결과는 명확하다. “잘난 체”와 “질투”이다. 또한 “노엽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말씀을 알아가고, 말씀과 늘 함께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면,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열매가 맺혀진다.

*그렇다면 바울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비교해 준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최소한의 기준, 벗어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아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그때 그때 점검해 볼 수 있는 나의 현주소를 판가름하는 체크리스트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란다.

-성령의 방식은 “깨우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내 안에 있어 늘 이 방식에 매여 살기 원한다.


*주님,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깨우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때 전심으로 순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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