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12-20 나와 같이… 다시 바른 복음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나와 같이 되기를(12절)” 요청한다. 이것은 이미 3:1-5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 시키고 바울 자신의 사역을 거짓 교사들과 대조하며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율법의 종이 되지 말고 자신처럼 예수님의 복음으로 믿음으로 자유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고뇌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처럼 성장하지 않아 거의 다시 낳아야 할 출산의 고통처럼 고통스러워 한다. 그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진 그들을 향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믿는 자신처럼 되기를 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를 생각하면서 성도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복음을 받았는지 상기시킨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된 것처럼(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믿는 것), 갈리디아 성도들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의 육체가 매우 연약해져 있었을 때였다. 당시 사람들에개 시험거리가 될 만한 약함이 바울에게서 보여졌지만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바울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14절)” 바울을 맞이해 주었다. 그때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받았던 기쁨과 자랑과 복스러움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워 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치명적인 약함(안질)을 위하여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음을 상기 시킨다(15절). 갈라디아 성도들은 약점이 분명한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천사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바울을 사랑하였던 그들이 이제는 “참된 말을 하는 바울을 원수처럼” 여긴다(16절). 이는 거짓 교사들의 열심에 성도들이 삼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이라고 말했다. 즉 거짓 것에, 율법의 종이 되려는 것에 열심을 내어 따르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른 복음에 열심을 내는 것은 금상첨화이겠지만,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내는 것은 모두를 망하게 한다. 갈아디아 성도들은 바른 복음으로 인해 누렸던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이 다른 복음으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낼 수록 하나님의 자녀다움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함께 무너진다.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족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내면 바른 복음이 주리게 했던 “하나님의 자녀의 복”이 속절없이 떠나간다. 그렇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새번역_19-20절).”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겠노라고 고백한다(19절). 할수만 있다면 직접 달려가서 인격적으로(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다른 복음에게 빼앗겨 버린 바른 복음의 삶을 회복 시키는데 간절하다. 오죽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다(20절)”고 말한다.
*언제라도 바른 복음을 다시 가르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 과정이 해산으 ㅣ고통과 견주는 인내의 시간들이 필요하더라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한다. 아… 바울 그는 정말 선한 목자중의 목자다.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하시고 그대로 살아내신 예수님처럼, 그도 역시 성도들을 위해 인내의 시간을 회피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가르칠 수 있을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서 “목양일념”이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다시 회복 시키기 위해 해산의 고통까지라도 각오하는 그의 모습에서 “목양일념”의 진정한 마음을 깨닫는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어리석다!” 일갈하며 탄식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가르침들을 상기 시켜 주면서 다시 바른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던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11)” 말씀대로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바울이 다시 직면하는 “해산의 고통”은 무엇일까?
바른 복음, 즉 세상과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숙함이 이루어지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양일 것이다. 그 모습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에 취하는 것에 대하여 언성을 높이고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단호함이다. 또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을 분별하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갈라디아 성도들이 취한 다른 복음을 털어내고 다시 바른 복음을 회복하도록 모든 힘을 쏟아 기록하여 보내는 편지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와 같은 해산의 고통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교사와 다른 복음을 분별하고 또 분별하기를 기대한다. 자신처럼 바른 복음으로 다시 오롯이 서기를 바라고 바란다.
나는?
-더온누리공동체와 함께 할 때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의 감격이 풍성하게 넘쳐나고, 이것이 메마르지 않기를 기대한다.
-나와 성도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서로의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용납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는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가 먼저 성도들의 약함을 지적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하고 기뻐하고 자랑하며 복스러워 하는 은혜가 넘쳐나면 좋겠다.
-공동체를 위해 언제든지 “바른 복음”으로 가르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해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이 마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굳건하게 붙잡아 주시기를 갈망한다.
*주님, 더온누리공동체는 주님도 그러신 것처럼 나에게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이기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더온누리공동체를 더욱 바른 복음으로 세우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감당할 힘을 주십시오.
*주님, 감히 바울처럼 저도 더온누리공동체에게 “나와 같이 다시 바른 복음으로”를 스스럼 없이 외칠 수 있도록 제 삶을 다스려 주십시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나와 같이 되기를(12절)” 요청한다. 이것은 이미 3:1-5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기 시키고 바울 자신의 사역을 거짓 교사들과 대조하며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율법의 종이 되지 말고 자신처럼 예수님의 복음으로 믿음으로 자유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고뇌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처럼 성장하지 않아 거의 다시 낳아야 할 출산의 고통처럼 고통스러워 한다. 그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진 그들을 향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믿는 자신처럼 되기를 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를 생각하면서 성도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복음을 받았는지 상기시킨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자신이 이방인과 같이 된 것처럼(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믿는 것), 갈리디아 성도들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의 육체가 매우 연약해져 있었을 때였다. 당시 사람들에개 시험거리가 될 만한 약함이 바울에게서 보여졌지만 놀랍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바울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14절)” 바울을 맞이해 주었다. 그때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받았던 기쁨과 자랑과 복스러움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워 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치명적인 약함(안질)을 위하여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음을 상기 시킨다(15절). 갈라디아 성도들은 약점이 분명한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천사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바울을 사랑하였던 그들이 이제는 “참된 말을 하는 바울을 원수처럼” 여긴다(16절). 이는 거짓 교사들의 열심에 성도들이 삼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이라고 말했다. 즉 거짓 것에, 율법의 종이 되려는 것에 열심을 내어 따르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른 복음에 열심을 내는 것은 금상첨화이겠지만,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내는 것은 모두를 망하게 한다. 갈아디아 성도들은 바른 복음으로 인해 누렸던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이 다른 복음으로 인해 무너져 버렸다.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낼 수록 하나님의 자녀다움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함께 무너진다.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족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른 복음에 열심을 내면 바른 복음이 주리게 했던 “하나님의 자녀의 복”이 속절없이 떠나간다. 그렇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새번역_19-20절).”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겠노라고 고백한다(19절). 할수만 있다면 직접 달려가서 인격적으로(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다른 복음에게 빼앗겨 버린 바른 복음의 삶을 회복 시키는데 간절하다. 오죽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다(20절)”고 말한다.
*언제라도 바른 복음을 다시 가르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 과정이 해산으 ㅣ고통과 견주는 인내의 시간들이 필요하더라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고백한다. 아… 바울 그는 정말 선한 목자중의 목자다.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하시고 그대로 살아내신 예수님처럼, 그도 역시 성도들을 위해 인내의 시간을 회피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가르칠 수 있을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서 “목양일념”이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다시 회복 시키기 위해 해산의 고통까지라도 각오하는 그의 모습에서 “목양일념”의 진정한 마음을 깨닫는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어리석다!” 일갈하며 탄식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가르침들을 상기 시켜 주면서 다시 바른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던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11)” 말씀대로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바울이 다시 직면하는 “해산의 고통”은 무엇일까?
바른 복음, 즉 세상과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숙함이 이루어지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양일 것이다. 그 모습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른 복음에 취하는 것에 대하여 언성을 높이고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단호함이다. 또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을 분별하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갈라디아 성도들이 취한 다른 복음을 털어내고 다시 바른 복음을 회복하도록 모든 힘을 쏟아 기록하여 보내는 편지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와 같은 해산의 고통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교사와 다른 복음을 분별하고 또 분별하기를 기대한다. 자신처럼 바른 복음으로 다시 오롯이 서기를 바라고 바란다.
나는?
-더온누리공동체와 함께 할 때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의 감격이 풍성하게 넘쳐나고, 이것이 메마르지 않기를 기대한다.
-나와 성도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서로의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용납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는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가 먼저 성도들의 약함을 지적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하고 기뻐하고 자랑하며 복스러워 하는 은혜가 넘쳐나면 좋겠다.
-공동체를 위해 언제든지 “바른 복음”으로 가르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해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이 마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굳건하게 붙잡아 주시기를 갈망한다.
*주님, 더온누리공동체는 주님도 그러신 것처럼 나에게 사랑, 기쁨, 자랑, 복스러움이기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더온누리공동체를 더욱 바른 복음으로 세우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감당할 힘을 주십시오.
*주님, 감히 바울처럼 저도 더온누리공동체에게 “나와 같이 다시 바른 복음으로”를 스스럼 없이 외칠 수 있도록 제 삶을 다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