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단호박! [갈2:11-21]
 – 2021년 09월 04일
– 2021년 09월 04일 –
갈 2:11-21 단호박!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사건은 이후 10여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폭발적인 증가가 이어졌다. 이렇게 급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은 주후 40년부터 50년 사이에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와 이에 따른 구원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들이 있었다.

바울은 주후 46~47년경 1차 전도여행을 시작했고, 이방인의 구원을 인정하는 ‘예루살렘 총회’는 주후 49년에 이루어졌다. 폭발적인 그리스도인의 증가 만큼이나 각각 산개 되던 복음에 대한 입장들이 정리되는 과도기와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 시간대를 지나면서 주후 50년대에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시작하고 60년대 중반까지 바울의 13권의 서신서가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신학이 정립되었다.

본문은 여전히 정립되지 않은 복음에 대한 시각과 태도들로 인해 경험한 어색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진짜 복음이 복음답게 세워지기 위해” 낯부끄러운 상황을 회피 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 어색해지더라도 진리의 복음을 오롯이 세우기 위해 민망함을 무릎써야 할 때가 있다.


1.마음으로는 동의하나(11-14절)
사도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회심하여 구원 받았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것은 구원이 할례나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서 가능한 것에 하나된 마음을 모은 것 이었다.

또, 이것은 율법의 정결법상 할례받지 않고 율법(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이방인들과의 접촉은 정결하지 못하다는 유대주의를 거부하고, 함께 교제하고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나바가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다는 율법에서 자유함”의 복음에 대해 이중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에 바울이 직접적으로 면상에서 나무랐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미 행 10장에서 이방사람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였음을 다른 사도들에게 증언 했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런데도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베드로는 바나바와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이들(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11-13절). 이에 바울은 격노한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새번역_14절)

베드로와 바나바를 매우 난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바울은 “찐 복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복음의 진리를 이중적인 위선으로 행동하는 베드로를 지나칠 수 없었다.

*때로 마음으로는 동의하고 인정하나 행동에서 이중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의도 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간에.. 그런 행동은 가끔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특히나 본을 보여 주어야 할 사람들이 말과 행동이 다를 때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들려오는 소문으로도 그러한데, 자신의 눈 앞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질 때… 그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쥐구멍을 찾고 싶을 만큼 당혹하게 하는 장본인이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지도자일때, 또 스승이나, 연장자일 때, 권위자일 때… 이것 참 뭐라 할 수 없는 당혹감은 큰 실망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어색할 수 있고 관계가 단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도…”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볼 때 주저하지 않고 직언했다. 그것도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모든 사람은 아마도 함께 식사 교제를 하다가 급히 자리를 피한 것을 바라본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 된 성도들이었을 것이고,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 이었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동의하나 여전히 삶이 되기에는 어색한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면서 확신이 든다. 어정쩡한 시기를 지날 때일수록, 마음과 몸의 행동이 일치된 삶이 중요하다.

*분에 넘치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렸지만,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찌끼들이 간혹 나타나도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중심이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베드로와 바나바처럼 간혹 마음과 몸이 다르게 행동하여도 “당혹스러운 직언이 오히려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은혜의 일갈이 되었을 참이다.

*중심에 십자가의 복음이 확고하다면, 당혹감이 마음의 상처를 내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의 음성”처럼 듣고 받아들여 “복음 중심”으로 속히 돌아올 것이다.

*나에게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누리는 믿음과, 때로 직언을 받아도 성령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과 실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견고히 작동하면 좋겠다! 그러면 “찐 복음” 안에서 살 수 있다.

*바울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성도들과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이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직언한 후에 다시 한번 “찐 복음”을 선포한다.


2.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15-21절)
본문은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한 말의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먼저 그들에게 “유대인으로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느냐고(14절)” 소리친다. 바울이 정말 화가 난 것이 느껴진다.

이어서 말한다.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새번역_15-16절)”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임을 확고하게 선언한다. 율법이 죄를 명확하게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하나님이 일부러 죄를 짓게(더 깨닫게) 하려는 분이라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17절)고 외친다.

그리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새번역_19-20절).”

율법에 대하여 분명히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나도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 이기에, 다시 율법의 저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고 말한다. “다시 율법에 얽매이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어서 비장하게 외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새번역_2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율법의 굴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때 파기 되었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할례, 안식일 준수, 정결법 시행)로 얻는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부각될 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시고 더 이상 율법의 방법으로 죄를 해결할 필요없이, 단지 나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러므로 나의 구원자는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믿을 때 구원에 이른다(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 놀라운 복음의 은혜에서 오는 율법의 굴레(짐)에 대한 자유함에서 어찌 다시 억압받음으로 돌이킬 수 있겠는가!

*죄인인 나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조건을 결코 만족 시킬 수 없다. 삶의 모든 것을 통해 생각과 마음과 행동으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의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데 가능이나 하겠는가!

*율법 아래의 삶은 결코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힘입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안에 내가 살고 있기에… 그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만 붙잡고 살아가리라!

*바울이 “찐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주저함 없이 진리를 선포하는 모습에 강한 도전이 된다. 이런 저런 이유와 형편을 들어 “주저하는 것”을 배려라고 여겼고, 미덕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진리에서 벗어난 배려는 오히려 진리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있다.

*마음에 상처 받는 것, 주는 것을 염려하여 오히려 진리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주저함 없는 단호한 외침 속에 담긴 마음… 진리를 오롯이 지키고자하는 마음… 마음에 서운함이 있어도, 관계가 틀어지는 변수가 일어나도,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깨우치려는 간절함과 열정을 본받아야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과 그로 인해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오직 믿음으로만 살리라!


*주님, 나에게도 과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복되지 않도록 늘 오직 믿음의 진리를 붙잡겠습니다.
*주님, 단호박(성격,언행이 단호함, 그런 태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진리 앞에서는 철저하게 단호박이기를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만들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ps.바울은 베드로를 향하여 왜 이토록 분노 했을까? 전하고 가르친 복음대로 행동하지 않는 모습 만이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교회를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마 16:18-19). 실제로 주님의 승천 이후 실제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한다.

주님의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여명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맛본다. 하지만 스데반이 순교 당하면서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고 그중 일부가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베드로는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고,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데리고 가서 함께 안디옥 교회를 목회한다.

때마침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고, 안디옥교회는 기꺼이 헌금을 보내 도운다. 이방인들이 모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도운 것이다.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구브로,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이 무렵 안디옥교회에 유대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며 이방인이 진정으로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이를 강요했다. 이에 큰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변증과 논쟁을 거듭했지만 쉽사리 끝내지 못했고, 예루살렘 교회로 달려가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숙의한 결과 “우상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지 말것(이것도 율법의 기준)”만 당부하는 선으로 타협했다. 그리고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엉뚱한 말로 안디옥 교회를 뒤흔든 이들은 예루살렘교회가 보낸 자들이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이 당연하지만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낸 이가 바로 베드로였다. 주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베드로도 고넬료 가정을 통해, 사마리아 지역의 복음화를 바라보면서, 또 분명한 환상속의 계시를 통해 깨닫고 확신했다.

그런 그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헬라인 그리스도인과 식사를 하다 슬며시 자리를 떳으니…. 바울이 열 받을만 했다…

*복음은 차별이 없는데, 사람은 여전히 은근하게 때로 자연스럽게 차별한다. 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면에서 바울의 단호박이 사이다다!

*사진: 렘브란트가 그린 <베드로와 바울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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