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 앞에서 [삼하 6:12-23]
 – 2022년 09월 28일
– 2022년 09월 28일 –

다윗은 궤를 옮기는 첫 번째 시도의 참담한 실패 뒤에 오벧에돔이 궤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용기를 낸다. 이번에는 “나름대로”가 아닌 “말씀하신 대로” 철저히 준비한다.

 

다윗이 궤를 옮기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한 것은 능률과 효율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 철저하게 각성한 후 그는 능률과 효율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게 하였다. 처음 여섯 걸음을 간 후 행렬을 멈추고 소와 살진 양을 잡아 제물을 바친다(13절). 그리고 베(모시)로 만든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14절).

 

다윗이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미갈”이 마음 속으로 그를 업신 여긴다(16절). 그리고 궤를 옮긴 후 화목제를 드리고 들어온 다윗에게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새번역_20절) 라고 말한다.

*미갈은 아버지 사울에게서 왕의 체통을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도록 교육 받았나 싶다.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었기에 체통이 어떻게 되겠나 반문한다. 이와 같은 심리 속에는 왕은 모든 백성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의 소유자이며 그에 걸맞는 행실로 구별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또한 모든 절대 권력을 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의 위치에 걸맞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심리도 있겠다.

*미갈은 이스라엘의 왕은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대리 통치자인 것을 간과한 말과 행동이었다. 다윗은 자신도 역시 이스라엘의 왕, 참된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그 이름을 찬양하는 그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다는 진실한 신앙고백으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미갈에게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새번역_21-22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울의 후손들이 있음에도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신 것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며, 천하게 보여도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라면 더 낮아 지고 싶다고도 고백한다. 이런 나를 신하들의 아내들은 존경할 것 이라고도 일침을 놓는다.

1.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12, 13, 15, 17절)
본문에는 “메다”라는 단어가 10절부터 포함하여 6회가 사용 된다. 특히 10절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새 수레에 싣고 나와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날뛰는 통에 궤를 손으로 잡은 웃사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다윗은 “노하여” 궤를 옮기는 일을 중단하고 근처의 오벧에돔의 집에 궤를 놓아둔다. 그런데 이 때 궤를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오벧에돔의 집의 옮길 때 “메어” 갔다고 기록한다.

*그제서야 궤를 옮기는 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백성들이 궤를 옮기는 법을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비나답의 집을 출발할 때 상식적으로 새 수레에 싣을 때 “메고” 나와 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웃사가 죽음을 당했을 때 다윗은 “노하며” 옮기기를 중단하였고 근처의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옮겨 놓았던 것이다.

즉,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길 때 “그제서야” “말씀하신 대로” 궤를 메어 옮긴 것이다. 그리고 석달의 시간이 흐를 동안 오벧에돔의 집이 하나님의 궤로 인해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음을 듣고, 다시 마음을 정하여 다윗성으로 궤를 옮기기로 용기를 낸 것이다.

*웃사의 죽음으로 실패한 궤를 옮기는 것을 절치부심하며 철저하게 점검하고 실행했음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는 대로 “메고”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여섯 걸음을 간 후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13절). 여섯 걸음까지 아무 탈 없이 이동했을 때 이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확인한 다윗은 매우 기뻤다.

2.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13-15절)
여섯 걸음 후 제물을 바치며, 베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추는 다윗(13-14절) – 에봇은 제사장의 옷이다. 다윗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선 제사장의 모습으로 섰다. 그는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려오는 길에서 백성들에게 그 기쁨을 함께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힘을 다하여” 자신이 먼저 예배자가 된 것이다. 세상이 인식하는 왕의 권위와 체통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하고 기뻐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체통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하는데 “힘을 다하여” 감당해야 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여호와 앞에서”(14, 16, 17, 21절) 라는 표현이 5회 반복된다. 사무엘서는 “여호와 앞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여호와 앞에서”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나, 사무엘, 요나단, 다윗, 우리아와 같은 이들이 여호와 앞에서 살았다면, 엘리, 사울, 요압, 미갈과 같은 이들은 여호와 앞에 살지 못한 이들이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마무리한다. 물론 온 백성들과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궤를 모신 후에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리고, 그,곳에 모인 온 백성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 건포도 떡 한 덩이씩을 나누며 기쁨을 누렸다(18-19절).

3.축복하려는 다윗, 저주 받으려는 미갈(20-23절)
이 모든 행사를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들을 축복하려 돌아온 다윗을 미갈이 맞이한다. 그런데 그녀는 다윗을 업신여겼던(16절)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새번역_20절 하)

미갈의 말은 빈정대며 조롱하는 말이었다. 이 말 속에는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행한 행실과 분명한 대조를 보이는 그녀의 관점이 있다. 그것은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새번역_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라는 표현이다. 미갈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했다.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라는 표현과 “방탕한 자”, “염치 없이” 라는 표현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조합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갈은 이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미갈의 마음 속에 다윗에 대한 업신 여김의 마음이 분명 존재함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신복의 계집종 앞에서”라는 말에서는 미갈이 “여호와 앞”이라는 마음 가짐보다 사람들의 눈 앞을 더 의식하는 삶을 살았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윗은 미갈의 이와 같은 천박한 조롱의 말에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며 반박하였다.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고 병기한 저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미갈이 처음에는 다윗을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통일 왕국의 왕이 된 자신의 남편을 아버지 사울의 시선과 마음으로 여전히 바라보고 있음을 꼬집는 것이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미갈에게 자식이 없다. 다윗과 동침을 하지 않았는지,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으셨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다윗과 미갈 사이에 큰 장벽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앞에서 사는 삶인가? 사람들의 시선 앞에 사는 삶인가? …..

*다윗처럼 여호와 앞에서 춤출 수 있는 삶인가? 미갈처럼 계집종의 시선까지 의식하며 외식하는 삶인가? 이는 평생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진실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질문이다.

*주님, 역시 말씀대로 “메고 메어” 순종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주님,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춘 다윗의 모습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도 늘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진실하고 힘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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