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형식보다 본질을…. [롬 2:17-29]
 – 2023년 05월 30일
– 2023년 05월 30일 –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어진다. 2:12절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경우를 계속 다룬다. 17-24절은 유대인의 위선을, 25-29절은 율법과 할례 문제를 다룬다. 문맥상 유대인의 정체성인 율법과 할례를 소유한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된다.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통로이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외적인 표지이다. 이 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이방인들과의 분명한 구분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 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언약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행하는 “의”를 통해 유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유대인의 문제는 언약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요소인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에 있다. 구약성경도 이와같은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로 언급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약속을 제시하신 원인이기도 하다.
 
 
 
1.율법과 유대인의 위선(17-24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존귀한 자리에 오른 유대인들은,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그것을 행하지 않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게 하셨다. 그들만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이 사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여 그들을 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율법은 의지의 대상이었고 자랑거리였으며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특권이자 축복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율법을 소유만 하고 있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하는 더 엄격한 책임과 실천을 요구하는 특권과 축복이기 때문이다(17-20절).
 
아쉽게도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에 취하여(소위 선민의식이라 일컫는) 타인과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판단하는데는 능하였으나 그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지도, 그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도 않았다. 율법이 금하는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를 서슴치 않았다. 율법을 소유하였으나 율법을 욕되게 하는 삶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방인의 빛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주저하지 않았다(21-24절).
 
*그리스도인이 받아 누린 구원의 은혜와 특권도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특권은 유대인들이 받은 율법이라는 자랑과 축복과 다를 바 없다. 즉,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은혜의 말씀은 소유하는 것을 넘어서 세상을 향한 빛을 비추라고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는 삶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바라보게 된다. 말씀은 먼저 받은 특권을 받은 사람이 그 말씀을 삶으로 전해야 하는 사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말씀을 깨달은 것을 자랑하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즐기면서 정작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 보다, 사람의 칭찬과 나의 유익만을 구하는 모습은 없는 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오늘 묵상하고 깨닫게 해주신 말씀의 은혜를 따라 살아내기를 힘써야 한다.
 
 
 
2.율법과 할례, 중요한 것은?(25-29절)
바울은 단호하게 설명한다. 만일 할례를 가진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그 할례는 의미가 없게 되고 곧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밖에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 무할례자(이방인)이 율법을 지키면 할례 받은 자처럼 여김을 받을 수 있다(25-26절). 26절의 “규례”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요구(정신)”의 의미이다. 무할례자들이 율법의 조항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 요구에 대해 창조하신 세계 속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요청을 볼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서 창조주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기에 구원을 향한 경주에서 출발선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율법의 정신을 행하면 마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처럼 여김을 받고 유대인과 같은 출발선에 위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14절). 이는 무할례자가 할례와 율법의 조문을 소유하고도 행하지 않는 유대인을 정죄하는 것과 같다. 
 
즉, 할례와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이방인의 위치와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비유대인에게 비난을 받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 또한 “행위대로” 평가 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의 특별한 신분을 보여주는 확실한 상징이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오히려 큰 심판의 근거가 된다. 율법과 할례는 몸에 부적처럼 지니라고 주신 것이 아닌 “지켜 행하라”고 주신 은혜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순종은 율법의 조항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살 때 가능하다. 날마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은 복음의 효과를 무시하게 만들지만,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 몸부림 치면 복음의 말씀을 따라 살아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3.마음의 할례(28-29절)
25-27절과 연결하여 왜 율법 행함이 없는 할례가 문제인지를 할례와 유대인의 관계로 부연한다. 진정한 유대인은 육체에 할례가 있기에가 아니라 율법 조문을 지니고 있어서도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외적 표지를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관계에 충실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로(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모세는 신 10:16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했다.
 
*율법은 소유했을 때보다 실천했을 때 유익하다. 율법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 모델을 따라 생명의 원리를 제공한다. 율법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자들보다 율법을 모르고서 율법이 요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더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들(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몸에 남은 할례의 흔적이 아닌 마음에 행한 할례이다. 즉, 할례의 참 정신을 따르는 자,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를 칭찬하신다.
 
 
 
나는?
-율법과 할례를 지니고 있었으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산 유대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겠다.
 
-특히 17-21절의 바울의 유대인을 향한 날선 비판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들어야 할 내용이다. 또한 24절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는 지적은 부끄럽고 민망하게도 지금 나에게,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하는 말인 듯 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율법과 할례라는 요소가 있듯이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교회 성장이니, 목회 성공이니 하는 섣부른 구호가 난무한다. 문제는 이런 구호가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내게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흥이나 성장, 발전과 성공이라는 단어에 함몰된 기독교가 아니라 본질의 가치를 추구하는 근본있는 기독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 역사를 되짚어 보면 중세가 교회의 영광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기의 교회는 참담한 족벌주의(nepotism)에 물들어 순수한 신앙인의 집합체가 아닌 세속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 권력의 중심에 있던 교종들은 물질과 성을 매개로 교회직을 팔았고, 간통, 동성애, 근친 등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로 인해 태어난 자녀들은 차마 아들이라 칭하지 못하고 조카로 신분을 둔갑 시키기 일쑤였다. 이들은 권력의 정점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게 하여 다음 교종 선택에 영향을 끼치게 하거나 스로 교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를 “추기경 조카(Cardinalis nepos)”라고 불렸다. 족벌주의(nepotism)라는 말의 기원이 부끄럽게도 교회였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세습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도 족벌주의(nepotism)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어디 네포티즘뿐일까? 바울의 날선 유대인을 향한 비판은(17-21절)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럽고 민망하다.
 
*너무도 참담하다. 오늘날 동네마다 교회가 이토록 많은데 청소년 자살률은 OECD 최하위이다. 이뿐인가? 어린이 행복지수도 최하위이다. 삶의 만족도 또한 도진개진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답할 뿐이다….
 
 
 
*주님, 목사라는 직분이 부끄럽습니다. 말씀대로 더 선명하게 살아내지 못해 더 부끄럽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날선 비판이 저의 폐부를 찌릅니다. 부디 이 지경에서 한 걸음씩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 율법과 할례라는 형식에만 치우치지 않고 본질의 가치를 따라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단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하늘 백성의 삶임을 확신합니다.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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