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인간 [롬 3:1-20]
 – 2023년 05월 31일
– 2023년 05월 31일 –
유대인의 나음과 유익은 무엇인가에(1절) 대한 대답이다. 이 역시 행함 없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진다. 율법 조문과 할례를 소유한 유대인들이 왜 죄인인지 설명하며 하나님이 심판의 정당함을 강조한다(1-8절). 또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도 죄 아래 있음을 분명하게 선언한다(9-20절).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통로이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법이다. 모세는 “당신들은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십시오. 그러면 여러 민족이, 당신들이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규례에 관해서  듣고, 이스라엘은 정말 위대한 백성이요 지혜롭고 슬기로운 민족이라고 말할 것입니다.(새번역_신 4:6)” 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통해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은 그들의 정체성으로 명령하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출 19:6)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언약 백성인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언약 관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1.유대인의 죄인됨,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1-8절)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이 심판을 받는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소유한 유대인의 유익이 무엇인가?(1절)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바울은 많은 부분에 유익이 있으나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2절)”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의 수준과 상황이 천차만별이지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전제한다(4절). 의로운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불의하다 하여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불의한 것은 아니다(5절).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 하실 수 없는 노릇이다(6절).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면 범죄한 죄인이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궤변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더 큰 죄를 열심히 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 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에 단호하게 반응한다(7-8절).
 
*하나님은 참되고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인들의 불신과 불의함으로 방해 받을 수 없다. 유대인의 반응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지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율법 조문과 할례를 소유했음에도 불순종하고 불의한 삶을 사는 유대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결코 부당하지 않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어떤 죄를 짓든지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죄에 대한 심판 받음에서 예외가 되게 할 수 없다. 죄에 대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
 
*오늘날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 문화와 관습의 논리에 빠져 악을 허용하는 삶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순간 순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순종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기를 갈망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받지 못한 율법과 할례라는 특권을 받아 누렸다. 그런데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다. 그들도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죄 아래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면 본문의 유대인을 향한 경고는 곧 우리를 향한 경고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의한 인간은 늘 핑계한다. 유대인들 중의 일부는 그 핑계를 신실하신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으로 발전시킨다. 이런 모습은 유대인 뿐 아니라 오늘날 나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이다. 내가 신앙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나태하며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아서라고 핑계한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삶에 대하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을 들먹이며 핑계한다. 바쁘다고 핑계하고, 누구 때문이라며 전가한다. 환경과 여건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모든 모습이 죄의 깊은 습성에 옭아매여 있는 것을 반증한다.
 
*나는 나의 불신앙과 온작 죄악의 모습들을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하고 있지 않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2.모든 사람이 죄인됨(9-20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기에 누가 더 나은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9절). 바울은 구약 성경의 여러 부분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음을 설명한다(10-18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은 한 사람도 없는데, 깨닫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고, 오직 모든 이가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10-12절) 선언한다.   
 
이어서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이를 부연 설명한다. 인간의 육체와 관련하여 목구멍(열린 무덤), 혀(속임), 입술(독사의 독), 입(저주와 악독), 발과(피 흘리는데 빠른) 길(파멸과 고생,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함), 눈의(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음) 순서로 모든 사람의 죄인됨을 설명한다(13-18절).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돌아서는 마음(10-12절)인 하나님에 대한 범죄와 진리를 싫어하고 타인을 죽이는 언행심사(13-14절)인 말과 악행의 범죄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다툼을 일으키며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15-187절)인 이웃을 향한 죄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불의한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을 부인하고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불의한 일을 자행하며, 자신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서슴없이 파괴한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과 이웃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죄의 능력을 아래 살고 있는 증거이다. 그 죄 아래 살고 있게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참담할 뿐이다.
 
바울은  율법 앞에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온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선언한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가르치고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일 뿐, 그것을 행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다. 즉, 율법은 구원의 기능을 할 수 없기에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율법은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알도록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아는 유대인도 죄를 해결할 수 없다면 율법 없는 비유대인은 더더욱 가망이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스스로 죄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구원의 소망이 없다.
 
*율법(구약)이 발하는 바 율법(행위보응의 원리) 아래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19절).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만 깨닫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1:18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불의한 모든 인간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 된다. 결국 성경인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떠난 모든 불의한 인간은 모두 다 죄 아래에 있고 결국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율법을 아안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의 요구을 다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루한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망의 종노릇 하는 곳에서는 어떤 소망도 일어날 수 없다.
 
*율법의 요구는 행함대로 심판 받기에 불의한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롭게 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 처절하게 불의한 내 자신을 바라보며 의롭게 하여 주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아침이다.
 
 
 
나는?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름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과 할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유효하기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지 못한 유대인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신 구원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신실하기에 그 말씀을 맡은 유대인의 유익 또한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 답게 살아내는 삶이라면 말씀의 신실한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으니 더 큰 죄를 열심히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궤변과 황당한 주장에 대해 누구든지 그가 행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과 심판날에는 어떤 핑계도 그들을 구원시키지 못할 것을 단호하게 각인 시켰다. 오늘날 교회 안에 “문화와 관습”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죄악된 행동을 합리화 하고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 논리에 쉽게 유혹 당하는 나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된다. 세상이 선이라고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악을 통해 선을 이루려는 생각을 분별해야 한다. 매 순간 변함없이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진실하기를 열망해야 겠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라는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받아 누렸다. 그러나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세상과 동일하게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을 생각할 때 세상의 것과 달리 구별하고 더욱 책임감 있게 은혜를 누려야 하리라.
 
*율법은 구원의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가르치고 깨닫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깨닫게 하시는 것을 따라 믿음의 순종을 행할 때 율법을 받은 백성의 삶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에 국한 되기 떄문이다.
 
 
*죄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합치는 것 보다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인종, 혈연, 지역, 학연, 빈부, 남여 등등이다. 동질감 보다는 이질감을 더 빨리 파악하고,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에 아파한다. 인간의 가장 몹쓸 죄성중의 하나는 “특권의식”이다. 무언가를 많이 가진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천박한 생각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교묘하고 집요한 이 천박한 특권의식은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에게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이 유대인의 특권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죄인됨도 단언한다. 유대인 스스로 높아져 개 취급하는 헬라인도 마찬가지로 죄인이다(9절). 슷로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나 모두 죄인이며 희망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뿐이다. 누구나 죽는 죽음은 죄에 오염되어 있는 증거인데, 그나마 이것이 이 땅에서 유일한 평등이지 싶다.
 
*죽음은 죄의 결과인데,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는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올려다 보는 높은 건물이나 산은 우주에서 내려다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유대인은 율법을 맡았으나 그 율법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20절).
 
*무엇보다 남들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소유했음에도 그것을 소유한 본분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수치와 부끄러움이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와 같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로 받은 구원은 이 복음으로 말미암았다. 그런데… 유대인들처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이는 수치와 부끄러움일 뿐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늘 영광의 복음을 소유하고도 이 땅의 부끄러운 것들과 다름 없이 살아 간다면 이 복음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저주이리라….
 
 
 
 
*주님, 세상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한 순간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 오직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희망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복음의 영광을 가리며 살지 않겠습니다. 복음의 은혜 안에 거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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