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수준은 비참하나, 신분에 걸맞게 [롬 7:14-25]
 – 2023년 06월 09일
– 2023년 06월 09일 –
바울은 선한 율법이 오히려 죄에게 이용 당하여 사망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환경이 “육체”에 있음을 밝힌다. 이는 인간이 육체에 거하는 이상 아무리 선을 행하기 원해도 악을 행하게 되고 선한 율법도 죄의 율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7:7-25절은 율법 아래 사는 삶의 딜레마를 호소하는 절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에 속한 가상의 “나”라는 인물을 내세워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고 계속해서 율법에 속해 있는 자의 갈등을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죄에 매여 율법을 어기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1.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나(14-20절)
죄 아래 있는 ‘나’에 대한 고뇌가 자세히 묘사 된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15절)’,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19절)’과같은 표현을 통해 “나”의 영적 좌절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미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는 그 나라를 향해 전진하며 경험할 수 있는 실패와 좌절의 고통을 공감하게 한다. 5장부터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대 가운데서 새 백성으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 되었다. 또한 이 세대의 특징인 죄와 사망에 대해서도 이미 죽었고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을 이미 선포했다. 문제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14절)” 때문이다. 육체 안의 인간은 죄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5-20절은 선한 율법을 가지고 이씅면서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나 실제로는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마는 “나”의 상태에 대해 묘사한다. 율법은 선하다(16절). 그러나 악을 행하게 하는 장본인은 내 속에 있는 죄이다(17절). 그 죄의 다스림을 조장하는 것은 “육신, 육체”이다(18절). 그래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20절).
 
이렇게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알고(14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도 하고(22절), 율법을 지키기 원하여 노력하며(15-21절),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사람이다(25절).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인 것을 6장에서 밝혔기 때문에 유대인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7, 10, 12, 13, 14, 16절) 매우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유대인일 가능성이 더더욱 커진다.
 
 
*아무리 율법이 신령하다 한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지킬 수 없다. 그는 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죄의 세력에 결박당해 있는 한 육법의 선함을 마음으로 인정하여 그 율법을 따라 살고 싶어도 선을 행할 수 없다. 죄는 율법을 지킴으로 누리는 것들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피러야할 대가를 더 두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율법을 온전하게 섬길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인간은 선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선함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담에 속한 이들이 행하는 일은 늘 악할 수 밖에 없다. 근원적으로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의 세력에게 눌려 있기 때문이다. 죄는 인간이 스스로 이기고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죄를 핑계하고 율법을 핑계하지만, 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2.죄에 이용 당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나(21-25절)
죄 아래에서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실존에 좌절한다. 이는 이 세대의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외적으로는 이러한 절망된 모습으로 표현하나, 유대인들이 속사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였다고 표현한다(22절). 그리고 23절에서는 “내 마음의 율법”이라는 표현도 이어진다. 내적으로 율법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선한 율법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순간, 너무나 허무하게 율법이 “죄”에게 굴복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 절망스럽다.
 
바울도 이 안타까운 모습을 나름 구별하기 위해 이런 율법을 “죄의 법”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법”이라고도 표현했다(23절_새번역). 율법을 자부하고 사랑하며 선하게 여기는 유대인들도 이처럼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죄의 법에 굴복하고 말았다. 인간의 실존이 이러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절규한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새번역_24절)”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실행하기는 커녕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고 결과적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깊은 장 탄식이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오호라(아!) 나는 곤고한(비참한) 사람이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자를 찾는다. 25절은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낼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선언한다. 유대인도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아래에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율법(주의 법)을 따르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의 모습만이 아니다. 모든 인류는 이와 같이 죄 아래에서 죄에게 종 노릇하던 가망 없는 존재들이었다.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도 갈등하고 절규한다.  그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속사람과 악을 행하는 자아에 갈등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절규한다. 무엇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외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는 부르짖음도 인상적이다.
 
 
 
나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이다. 율법이 사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실제가 사마응로 이끈다. “죄”는 선을 행치 않고 악을 행하는 내 자아의 실존이다. 죄를 짓는 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야 사망의 문제가 해결된다.
 
-율법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인다. 옛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율법은 죄를 알려주고 정의하여 주기에 “죄의 법”이다. 새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법”으로 보인다. 이 두가지 시각은 인간이 매일 직면해야 할 삶의 현장을 대변한다. 사망의 몸을 비참해 하며 좌절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함을 누리며 화목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고 주저할 것이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붙잡아야지!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다.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나를 규정하게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생명 안에 거하면서 죄를 따라 간다면 사망의 길을 걷는 것이다.
 
-본문에서 밝히는 율법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먼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점이고 그래서 결국 즉음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망의 원인이 아니다 죄가 사망의 원인이다. 율법은 죄를 정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선한 것(신령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계와 실존을 드러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이는 율법이 인간의 한계와 실존을 깨닫게 하여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갈급한 영혼이 되어 간절히 복음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복음을 듣고 우리의 실존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복음을 듣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예수 사건)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곧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주의 말씀 곧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이 선순환의 경험들을 지속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든든하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
 
 
*율법이 수준을 알게 했다면, 복음은 그 수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은 새 사람, 새 백성의 신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수준과 신분의 차이를 줄여 나가는 것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나는 말씀이 알려주는 수준과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서의 신분에 걸맞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주님, 율법이 알려주는 저의 수준이 참담하나, 하나님의 의로 새롭게 된 저의 신분이 너무도 차이가 납니다. 그럼에도 은혜로 받은 신분에 걸맞게 살아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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