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오직 하나님의 주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롬 9:19-29]
 – 2023년 06월 14일
– 2023년 06월 14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시고 결정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유대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남기셔서 구원에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은 진노를 받을 이방인 가운데서라도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같은 구원에 참여하게 하신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의 구속사 속에서 언약과 율법을 소유한 맏아들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그 율법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기능을 부여 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이런 기능을 부여 받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인가? 더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새 언약 백성의 범위에서 제외 되어 있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바울은 이 모든 것의 대답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섭리에서 찾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계획을 수행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그 주권이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19-23절)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긍휼히 여길 자와 완악하게 여길 자를 스스로 결정하셨다면(18절) 왜 하나님은 여전히 완악한 자들을 “허물하시느냐?(멤포마이_비난하다, 꾸짖다)”는 질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롬 1:18-32절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은 역사 속에서 항상 동시에 일어났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면, 그는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고 이미 밝혔다. 그런데 19절은 인간이 마치 아무런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반박한다. 이 반박에 바울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20-23절에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주권과 자유을 언급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진흙덩이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논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지음받을 물건이 지은 자에게 그 생김에 대해서 항변할 수 없다. 진흙으로 귀하거나 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이다. 여기에서 천한 그릇은 이방인일수도 문맥상 소외된 유대인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어떤 특권을 누려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 속에서 “천한 그릇”이 되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과 흡사하다(17-18절). 유대인들이 예수 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스스로 거부했다(3:3).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 신비로운 구원 꼐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을 천한 그릇으로 계획 하셨다 한들 누가 이에 대해 반문할 수 있겠는가?(20절 상).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에게 천한 그릇 역할을 맡기든지, 귀한 그릇 역할을 맡기든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이 “긍휼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진노의 심판을 진행하려 하시려다가도, 멸하기로 준비된 그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으로 고백한다(22절). 또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을 따라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23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진노의 그릇, 아니면 긍휼의 그릇에 해당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이나 긍휼의 그릇이나 모두 선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이와 같은 하나님이심을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에게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그들과의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3:21-26; 5:1-11; 8:31-39) 선포했었다. 
 
 
 
2.자신의 백성을 스스로 부르시는 하나님(24-29절)
바울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자신과 로마교회의 성도들임을 고백한다(24절). 우리들은 하나님의 관용으 ㅣ대상이 되어 긍휼하심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따라 긍휼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9:6-13).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로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1:18-32에 의하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이들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호세아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25-29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들을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25절을 통해 호세아 2:23을 인용하여 밝힌다.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⑭”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 ⑭호 2:23(새번역_25절)” 또, 호세아 1:10도 인용하였는데 “①”‘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②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①호 1:10  ②그, ‘아들들'(새번역_26절)” 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을 가리킨다.
 
 
이어서 유대인들 가운데 긍휼의 그릇으로 부름 받은 이들을 27-29절을 통해 언급한다. 이들은 이사야 10:22을 인용하여 남은 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27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완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시행하실 것”이라고 이사야 10:23을 인용하여 추가로 설명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새 언약 백성으로 진입하게 될 것을 암시한느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이 철저하게 이루어 질 것도 함께 의미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많이 남겨 두셨기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전멸하는 것을 면했음을 밝힌다(29절).
 
 
 
나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대로 하실 권한을 가지셨다(19-23절).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는 그릇에 대해 완전한 권한을 가진 토기장이와 같다. 어떤 그릇을 귀히 만들어 쓰고, 어떤 그릇을 천하게 만들어 쓰실 지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따질 수 없다. 토기는 그저 토기장의 손에 빚어진 대로 만족하며 감사할 뿐이다. 나의 좁디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쉽게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교만의 극치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순종과 감사와 찬야일 뿐임을 기억해야 하리라.
 
-이방인을 불러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24-26절). 유대인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불러 내어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고 원였던 자들을 불러 내어 사랑하는 자라고 하시는 분이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내게도 임하여 지금 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27-29절). 이스라엘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거절하여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구원의 씨를 남겨 두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은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진멸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많이 남겨 두심으로 자기 백성중에서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 주신 것이다. 이처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도 그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시면서 구원의 씨로 남겨 두신 사람이 바로 나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남은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 가운데서 나를 긍휼히 여길자로 선택해 주셨다. 그것은 내가 선택 받을만 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 어떤 선택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직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여 주심으로 내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혈통적인 유대인 안에서만 부르시지 않으셨다.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실 권리가 있으시다. 불순종한 유대인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이방인이 유대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고 주를 찾으면 그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혈통적인 유대인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마음과 뜻을 순종한 이방인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셨다. 하나님의 백성되는 길은 인간에게 당연한 권리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사하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모두 사라질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남겨 주심 때문에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된 것이다. 구원의 백성이 된 것이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남은 자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신앙에는 신비라는 것이 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교리가 있고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이와같이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새번역_9:20~22a).
 
*구원과 관련하여 사람이 할 일은 없다. 하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할 일이 태산이다. 받은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이루어 주신 신비한 은혜의 영역이지만, 구원 받은 인간의 삶은 인간이 살아내야 한다. 어제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오늘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내는 것은 오롯이 나의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꿋꿋하게 말이다.
 
*본문에서 인용된 구약의 말씀들은(호 2:23; 1:10, 사 10:22-23; 1:9; 13:19) 모두 이스라엘이 메시아(그리스도)를 거부한 부분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말씀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격과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 삼아 주신 것이다. 호세아가 음탕한 고멜을 다시 되사오는 일이나, 이사야의 글에서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결국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결국 그 남은 자 조차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씨라고 밝히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반문하는 것은 피조물의 도리가 아니다.
 
 
 
*주님,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때문에 남은 자 되어 거룩한 새 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이 구원을 잊지 않고 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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