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고, 비판하지 말라 [롬 14:1-12]
 – 2023년 06월 24일
– 2023년 06월 24일 –
로마 교회 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후 시장에 나온)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문제와 안식일을 지키는 “날의 문제”로 서로 판단(비판)하거나 업신 여기지 말 것을 권면 한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 중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음식법이나 안식법과 같은 율법 규례의 효력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규례를 지키지 않는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된 이들과 마찰을 빚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수용하라고 주문한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살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을 상기 시킨다.
 
공동체 안에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받아주라(1-2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그대로 받아주고 그들의 연약함을 문제거리로 삼지 말라 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특정 기준에 맞게 고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판단으로 연약한 자들을 공동체에서 떠나지 않도록 격려하고 용납해 주어야 한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지칭한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지는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정결법과 관련된 음식과 안식일과 같은 율법 규례들을 고집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들을 “연약한 자들”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복음 자체의 능력보다 오랜 율법에 의한 관습을 고집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받으라(1절)”고 명령한다. 이 표현은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신앙공동체로 수용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들의 의견이나 행동에 섣부른 결론을 내거나 단정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중에서 일부가 율법의 조항도 준수하려는 것이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이해가 전제되고 있다면 이와 같은 행동들을 당장 고쳐야 한다며 그들을 압박했을 수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접근태도에 제동을 건다.
 
오랜 세월이 쌓여 익숙하게 쌓인 쉽게 고칠 수 없는 종교적인 관습과 사고를 지금 당장 고쳐야 한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믿음의 내용과 형식도 중요하나, 구원의 삶을 살아내도록 거기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배려를 베푸는 것도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도 이 원리에 순종해야 한다. “받아들임, 받아 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이 깃든 표현인지 모른다. 의견이 다르므로 갈등이 일어났을 때 먼저 살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더 성숙해 나가기 위해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원리와 원칙을 지키려고 도리어 공동체 안의 지체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무수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상처들을 새기게 된다.
 
 
 
2.받아 주어야 할 이유(3-12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주는 것의 시작은 “업신 여기지 않는 것, 비판하지 않는 것(3절)”이다.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받아들이셨고 그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3-4절).
 
또, 이렇게 행하는 이들의 행동도 모두 주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6절). 개인적인 욕심이나 욕망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주님을 따르는 최선의 표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불필요하게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에(10-12절), 우리가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섣불리 심판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내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닌지 늘 살펴 보아야 한다. 주의 뜻을 좀 더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의 위험성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악에 대하여 어떤 문제를 삼을 수 조차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악을 판단하고 대적할 수 있지만, 같은 공동체 지체에게 나 자신이 심판자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즉, 각 자 다른 신앙의 가치에서 나오는 행동들은 자기 이익을 따라 판단하는 것을 주의해야 할 이유가 모두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이기에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백성이기에 나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나는?
-바울이 우상 제물과 안식일을 거론한다. 당시 교회는 우상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논쟁 거리였다. 이 때문에 교회마다 몸살을 앓았다. 바울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하여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자유함이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생각하여 조심하라고 권면한다(고전 8:4-11). 심지어는 음식으로 인해 형제가 실족 한다면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까지 했다.
 
*본질은 중요하게 여기되 현상을 간과하지 말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교회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등의 문제가 더 이상 논쟁 거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본질을 꿰뚫어 보고 비본질의 현상을 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침이 없다.
 
*그럼에도 나도 가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거나 하찮은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을 때가 있다. 주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을 질타하시면서 “눈 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구나!(새번역_마 23:24)” 라며 탄식하셨다. 이 탄식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새번역_마 23:23)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 탄식이셨다.
 
*본질보다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의 태도가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믿음이 단단한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이들도 있고 믿은지 꽤 오랜 성도들도 있다. 성숙한 이들도 있지만, 성숙이 꽤 더딘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새번역_1절)” 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새번역_8절)”라고 권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이지 함께 구원받은 성도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음식이나 날에 대한 판단과 행동은 모두 주를 위하여 감사함으로 먹고 지킨다. 구원 받아 새로운 하나님 백성이 된 이들은 자기를 위하여 먹고 살지 않는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성경에 이른 것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들이다. 그런데 각자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섬기기는 데 다름이 있을 수 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부분을 서로 틀리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서로 용납하지 못한 태도 때문이다. 다름을 틀린 것이라고 판단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강요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면 역시 우리도 중심을 보는 몸부림을 쳐야 한다. 그 마음의 진정성들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용납과 배려와 존중은 중심을 보고 받아들이기 위해 내 삶에 나타나야 할 몸부림이다. 지금도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괴와 공동체 분열의 위기 앞에 이 말씀으로 순종하여 겸손하게 용납과 용서에 용기를 내야 한다.
 
 
*주님이 용납하셔서 나의 모든 것을 받아 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판단과 분열의 문제는 분명한 해결책이 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주신 사랑으로 “받아 들이면” 된다. 내가 먼저 비판하고 업신 여겼던 이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고 용납해야 할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위기 가운데 있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의 마음은 스스로 판단하여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당연히 정죄하고 판단하며 비판할 수 있으시나 사랑으로 감싸 주셨다. 용납하고 받아주셨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 받은 공동체 안에서 나의 기준을 고집하는 것에서 오는 갈등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늘 자기 생각, 경험, 판단이 먼저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심지어 그 고집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에도 꿈쩍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비본질적인 것에 모든 가치와 힘을 쏟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작 지키고 고수해야 할 본질적인 믿음의 문제는 가볍게 여기고, 굳이 고집하지 않아도 될 문제로 정작 믿음의 영역에 큰 시험이 들어 무너지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자초하는 경우가 꽤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연결된 말씀이다. 부디 본질을 바라보고 현상에 마음이 빼앗겨 영광스러운 주님의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구원의 은혜 외에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심지어 사랑하고 화평한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리를 기꺼이 내려놓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권위나 리더십도 화평하고 사랑하는 것 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
 
*사랑하고 화평하기 위해 자기 권위, 자기 방법을 당연히 내려놓는 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사악한 우리는 불편한 갈등 상황들을 이용하여 좀 더 자기 권위, 자기 방법을 고수하기 위해 완고한 마음을 품는 것을 주저하지 않지만, 성숙한 주님의 백성들은 이조차도 주님의 공동체 안의 사랑과 화평, 덕을 세우기 위해 기꺼이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그런 자기 내려놓음의 삶을 사는 이에게 주님의 시선이 머문다. 그 놀라운 은혜 아래 거한다.
 
*부디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주님,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 업신 여김, 비판보다, 용납과 배려, 받아들임의 삶을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불편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입장)을 취하지 않기를 빕니다. 사랑하면 양보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용기를 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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