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 [렘 1:1-10]
 – 2023년 07월 06일
– 2023년 07월 06일 –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본문은 그 선지자 예레미야의 출신과 활동 시대, 그리고 소명 기사를 다룬다. 그는 아나돗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이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방향으로 4~5km 떨어진 지역으로 솔로몬 시대 제사장 아비아달이 권력에서 쫓겨난 후 유배된 지역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에 처음 선포를 시작했고 남유다의 멸망을 직접 경험한 몇 안 되는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방관자”가 아니시다.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특히 유다가 멸망 위기에 처한 주전 7세기 전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고 당신의 의지를 선포하게 하셨다.
 
 
 
1.예레미야의 배경(1-3절)
예레미야가 활동한 기간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요시야의 통치 십삼 년부터 시드기야의 통치 십일 년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2-3절). 그가 활동한 시기는 회복의 불꼿이 활활 타올랐다가 갑자기 사그라지고, 유다가 멸망의 길로 내몰린 격변의 시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존을 위한 유다의 정치와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성전 파괴와 하나님의 백성의 유배는 매우 신학적인 사건이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의지를 계시하시고 살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셨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게 된 참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파국적인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삶을 살아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오늘날 예레미야 묵상을 시작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사건들을 그저 현상으로만 보지 말고 그 사건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 묵상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내밀한 마음과 뜻을 통찰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2.예레미야를 부르시는 하나님(4-10절)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모습에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다. 아니 파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태에서 지으시기 전에 이미 예레미야를 아셨고,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그를 구별하셨다(5절 상반절). 보통 예언자는 생의 한 가운데에서 부름을 받음에도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예언자로 지음을 받아 예언자로 태어났다” 그는 예언자로 태어나서 예언자로 죽었다.
 
예언자로 선택받아 태어난 그였기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여호와의 메세지로 내어 드렸다(16:1-9). 또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니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움을 받았다(5절 하반절). 이는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될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유배가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선포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 예의상의 거절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 예언자의 직분을 감당할 만한 사회적인 위치도 못된다는(아나돗 출신 제사장) 의미도 담겨있다. 사회적인 지위나 자격 조건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능력과 자격이 없다고 거절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하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부름받은 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누구에게 보내든지, 무엇을 명령하든지”가야하고 말해야 한다(7절). 예언자로서 개인적 자질이나 사회적인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일 뿐이다.
 
또 명령만 강요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절)”라고 약속하신다. 예레미야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도록 함께 하여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동시에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는 자들의 반응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적대적일 것도 암시한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신다(9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와 결정을 선포할 자로 예레미야를 선택하셨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는 스스로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15:16)”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는 지기 말, 자기 묵시를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입에 담아주신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예레미야를 전적인 의지로 대언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위임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0절) 예레미야의 입에 넣어주신 말씀을 선포함으로 민족들을 멸망시키기고 나라들을 세우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민족들을 멸망 시키고 – 심판, 나라들을 세우는 -구원과 회복…예레미야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이지만, 더 나아가 구원 예언자로서도 활동하게 될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의 사역 범위는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이다. 그리고 이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홍와께서 이 땅의 진정한 통치자 이심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예레미야는 가장 완악한 시대에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불안한 격변의 시대였는데,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후 결국은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가장 완고한 반역과 패역의 시대를 향해 4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특정 시대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하기 위해 특별하게 부름받은 사람이었다. 이 시대, 이 나라, 내 가정의 형펀과 처지를 탓하기 전에 이와 같은 시대를 살아내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먼저 기울여 보면 어떨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먼저 알고 부르신 선지자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을 알고 구별하여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셨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그로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결정하셔서 부르셨다.
 
-그는 아직 어려서 때가 아니고 또 감당할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며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창한 언변으로 백성들을 설득 시키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가서 명령 받은 대로 전하기만 하라고 하신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가차없는 겸손과 소극성이 언제나 옳은 것은 결코 아니다. 명백한 실패가 기다려도 그 일을 부르시고 맡기시며 보내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동행을 약속받은 지도자 예레미야…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함께하여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두려워할 만한 위협과 위험 속에서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분명히 보호의 약속인데 고난과 위협과 박해와 심지어 죽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앞에 평탄한 길만 조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시밭길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걸음을 걷도록 역사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환상이 있다. 철없던 시절에 하나님의 원대한 소명자로 부름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낯부끄러운, 이불킥을 할 수 밖에 없는 민망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예레미야의 “나를 부르시다니요 슬픕니다”라는 고백도 이해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예레미야의 심정이 너무도 공감이 된다. 묵상을 하며 너무 안쓰럽다. 그의 일대기를 알고 있는 터라 더 그렇다.
 
*예레미야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 후손이 아니었다. 솔로몬 때 아도니야와의 권력계승 다툼 때 아도니아의 편에 섰다가 예루살렘에서 아나돗으로 추방당한 아비아달의 후손이었다. 종교적으로 정통과 중심에서 소외된 잊혀진 지역에 살고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난미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그만큼 남유다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떠했을지 이해하게 된다.
 
*실제로 이사야가 남유다 멸망 100년전에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예레미야가 멸망의 시기를 고스란히 살아내며 40년간 선포했는데, 연대기적으로 보면 위대한 이 두 예언자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약 30년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이 기간은 어느 때 보다도 거짓 선지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뒤집을며 평화와 번영만 예언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강력한 철권 통치로 유혈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 므낫세 통치 기간에도 일어난 현상이었다.
 
*30년 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것이다. “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새번역_9-10절)
 
*허…. 예레미야의 마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정치적인 상황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래로는 애굽과 북으로는 새롭게 떠오르는 강력한 바벨론 사이에서 사활을 걸고 외교력을 통해 생존을 위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던 그 시대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예레미야 말씀 묵상의 시간동안 남유다의 실패와 멸망이 우리 민족에게 재현되기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살아내고자 간절하게 다짐해본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이 아니면 희망이 없다. 거짓 선자들의 거짓 평화와 번영에 중독된 멸망의 길이 아니라 당장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나를 되돌아 보아 회복의 과정이 쓰라리지만, 다시 살아내는 결심을 단단히 다졌으면 좋겠다.
 
 
*예레미야 묵상이 기대 반, 버거움 반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 국제관계, 사회현실, 교회문제 등은 남유다 말기의 세태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예레미야의 “슬픕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나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고 파괴하여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다시) 건설하고 심게” 되는 것이니 희망을 갖고 말씀에서 길을 찾아 보련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는 은혜 안에 있으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나의 마음과 뜻이어야 한다. 심판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옳은 길로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분명하다면 그 의지의 사랑을 받아 누려야 한다. 고난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게 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묵상의 시간 동안 내 삶 속에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시는” 말씀을 담담히 받아들이리라.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고 심으시는 역사를 기대하리라.
 
 
 
*주님, 예레미야의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 예레미야의 입에 두신 말씀을 나의 입에도 주십시오. 더욱 말씀을 말씀답게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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