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헛된 것을 따라가니 헛된 것이 되어버렸다 [렘 2:1-19]
 – 2023년 07월 08일
– 2023년 07월 08일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처음 관계는 어땠을까? 본문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청년, 신혼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랑을 꽃 피우던 시절을 상기 시키신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랐던 때이다(2-3절). 하지만 이 시기는 참으로 짧았다. 하나님과의 사랑하는 시기에 비교하여 훨씬 많은 양을 할애하여 이스라엘의 반역을 서술한다. 짧은 허니문 기간이 끝이 나고 끝을 알 수 없는 배교의 역사가 묘사된다.
 
예레미야가 다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랐던 시절(2-3절)과 배교의 시절(4-13절)을 서술한다. 서술의 중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교한 것이 이스라엘 조상에서부터 현재까지 너무도 오랜 기간이라는 것이다. 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부터 배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배교는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만이아니라 그 후손에게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그 결과는 포로였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는 배교의 결과이며 행위의 열매이다(19절).
 
 
 
1.사랑했던 시절(1-3절)
하나님과 이스라엘도 ‘신혼 때의 사랑’처럼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의 시간이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부족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열심을 다하여 남편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만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여호와를 위한 성물(3절)”로 표현하셨다.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백성이었다. 여호와의 성물이었기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로, 그분의 소유물로 남아있을 때 남편과 소유주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이스라엘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모든 보호에서 제외된다.
 
 
 
2.여호와를 버린 가나안의 이스라엘(4-8절)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고질적인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그들이었지만 가나안에서는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다(5절)” 이스라엘의 배반은 하나님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헛된 것을 좇다가 헛된 사람들이 되었다. 죽음과 암흑의 땅 광야의 길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가나안에서는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각자 자기를 만족시키는 신을 만들어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심히 좋은 땅 가나안도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로 인해 부정하고 가증한 땅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들을 지도자들이 앞장 섰다. 율법을 맡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권력자들은 자기 권력에 취해 하나님께 반역했다. 선지자들은 풍요와 쾌락의 신 바알을 섬겼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참담한 것은 예레미야의 외침이 그 때, 그 시절에서 멈췄으면 좋겠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쳐지고 있다는데 있다.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어두웠던 조선 땅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랑을 보내주셨다. 지극히 적은 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시간처럼 혹독한 선교 초기의 시간들이 채워졌다. 하지만 그 때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 시기였다. 아쉽게도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오늘날 까지 “헛된 것”에 더 마음이 끌려 “헛된 것”이 되어 버린 교회들이 가득 찼다.
 
*지도자들은 내로남불 법 위에 군림하여 입술로는 공정을 말하지만 지극히 불공정한 사회를 부추긴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정치권력자들과 야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정치 논리를 말씀으로 포장하여 현혹 한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여 복 받는 법을 가르친다.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따르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다를 바 무엇인가?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유익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헛되고 무익한 것을 좇다가 헛되고 무익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참담하다.
 
 
 
3.현재상황(9-19절)
1-8절이 회고 형식의 고발이었다면, 10-13절은 현재 시점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한다. 특히 9절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너희 자손들의 자손들)’에게 소송을 거신다. 고발의 대상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까지 포함되었다.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과거) 너희(현재)와 너희 자녀들(미래)는 모두 똑같다. 모두가 한 가지로 “헛된 것”을 좇았으니 언약을 파기하신다.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이스라엘을 고발하신 것은 이들이 뼛속까지 우상숭배자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인내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신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새번역_13절)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존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위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을 팠다.
 
*샘에서는 언제나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지만, 웅덩이의 물은 겉으로는 깨끗하여도 몸에 해로울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헛된 것에 빠져 물 근원을 버린 것이다.
 
 
예레미야는 정치적 자유를 빼앗기고 강대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참담한 이스라엘의 현재를 탄식한다. “여호와를 위한 성물”이 이방 나라들의 종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 시켜 주셨는데, 다시 이스라엘이 스스로 종이 되어 대를 이어가며(씨종) 종살이를 한다(14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이 힘 있는 자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언약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은 굶주린 사자들의 먹잇감에 불과하다(15절). 남편의 보호를 박탈당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디서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애굽도 대적이 되었다(16절).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강대국을 의지하여 생존을 모색한 이스라엘이 파국적인 경험을 했음에도 깨닫지 못한다.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유브라데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내려간다(18절). 생존을 위해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던 것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지도자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시홀의 물과 유브라데의 물을 찾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 모양 아닌가? 하나님께서 해방의 은혜를 주셨건만, 잘못 선택한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다시 종살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참담하기 그지없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선언하신다.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너 스스로 나에게서 돌아섰으니, 그 배신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고서 깨달아라.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새번역_19절)
 
이스라엘이 범한 악과 배신(반역)을 “징계”하시고 “책망”으로 이어진다. 악이 성장하여 재앙의 태풍으로 덮치고, 반역이 보호를 박탈하여 민족들의 침략을 이끌어 온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악과 번역이 얼마나 악하고 쓰라린지를 “보고서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알려준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나를 경외함이 없기(19절)”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19절 하반절의 화자가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구나,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는 배교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를 지목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분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도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아름다운 신혼시절이 좋았다. 그 힘겨웠던 광야 시절이 차라리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가나안의 환경과 비할 바 되지 못하나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인 사랑은 확고하였고 하나님의 존재감은 또렷했다.
 
-열악하고 불확실한 조건들이 더욱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힘겨운 삶의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푸념하는 성도들이 꽤 있다. 이스라엘의 광야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오히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또 찾아 실제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가나안은 광야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웠다. 그 땅을 선물로 받았으나 그곳에서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찾기보다 헛된 것을 추구하며 헛된(거품)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은혜의 땅을 부정한 땅, 가증한 땅으로 일구어 버렸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영적 지도를 맡은 자들이 불의에 앞장섰다. 말씀을 맡은 자들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몰랐다.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반역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대신에 바알을 섬겼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존재감이 사라져 버렸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시키실 것이다. 헛된 것을 추구했으니 헛된 존재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항변할 수 가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에 신이 아닌 것들로 바꾸고,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꾼 이스라엘게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존재감을 드러내실 것이다.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와 다를 바 없는 시홀과 유브라데의 물을 찾는 그들에게 갈증을 더하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댓가를 치루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받게 될 심판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무자비의 결과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자초한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 대신에 앗수르를 의지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버린 것에 대한 고통을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참담한지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의지한 것들이 심판의 수단이 되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받은 멸시를 그들의 수치스러움으로 되갚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의 죄를 범했다. 하나님을 버린 것과 하나님 대신 거짓 우상을 따른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오아시스를 버리고 웅덩이를 판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나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방법과 우상을 따르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생명과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터진 웅덩이인 내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배신은 비극을 불러왔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스스로 불러온 참극이었다. 그들이 의지한 애굽에게 침략을 받아 땅은 황폐하게 되었고 마을과 도시들은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애굽이나 앗수르가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심을 신뢰하지 못했다.
 
 
*지금 이 나라의 지도자들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의지하며 신뢰하는 정치를 행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엘리야가 하나님께 푸념했던 “모두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저 혼자입니다”라는 말이 공감이 된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소망이 된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이 있다”
 
*부디 이 나라와 민족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의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본문의 지도자들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무지함 속에서 아주 당연하게 내리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상관 없는 우상을 따라 정치를 행한다면?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일을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자기 만족을 위해 대다수 국민들의 고통을 공감과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자,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불평등을 당연한 공정으로 포장하여 속이려는 자, 소수의 기득권층을 위해 다수의 국민들에게 불편과 부당함을 강요하는 자, 정의와 평화보다 불의와 대립을 획책하여 편가르기를 당연히 획책하는 자,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오가는 정치적 행보와 꼭 닮은 여기 저기를 오락 가락하는 자….그런 자가 지도자가 되지 않기를 바래야 한다.
 
*남유다의 정치 모양이 어쩌면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재현되는 듯 보이는 것일까? 참담하고 고통스럽다…..
 
 
*헛된 것을 쫓지 않는 지도자들이기를 기도한다. 내 자신부터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진 마음이기를 소망한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예레미야의 슬픈 낯이 향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 교회를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자,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의보다 자신의 영달과 행복을 우선하는 자, 규모와 힘을 숭배하여 작은 것과 약한 이들을 무시한다. 이와같은 이들이 어찌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바알의 자식이며 맘몬의 수하들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지도자들의 행태 때문이다. 이런 지도자는 아무리 많아도 세상을 향해 무기력하고 교회 안 성도들에게는 무능할 수 밖에 없다. 수 만개의 교회가 밤 하늘에 십자가를 수놓아도 주님의 의로우심이 이 땅에 드러나지 못한다.
 
 
 
*주님, 이 참담한 말씀을 그저 반면교사 삼아 저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나라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특히 저에게 더욱 자비를 베푸셔서 더온누리교회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공동체로 세워가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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