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우이독경(牛耳讀經)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 [렘 2:20-28]
 – 2023년 07월 09일
– 2023년 07월 09일 –
우이독경(牛耳讀經)_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옛적부터 가나안의 풍요 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되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자신이 우상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본질이 바뀐 타락이었기에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해서는 2장 13절에서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죄를 두 가지 비유로 고발한다. 첫째, 포도나무에 비유된다(21절). 하나님은 좋은 종자를 심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방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지만, 스스로 적극적으로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둘째, 들암나귀에 비유된다(24절). 발정기의 들암나귀를 아무도 막을 수 없듯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막을 자가 없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안의 우상 수가 “성읍 수”와 “신들의 수”가 같다고 선포한다. 처절한 선포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이독경”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우상숭배자라고 고발하는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나는 더럽혀지지 않았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23절)”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적인 우이독경의 상태는 무엇인가?
 
 
 
1.우상숭배에도 뻔뻔하다(20-21절)
20절을 읽어보자.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이스라엘은 구원하신 은혜를 배반하고 언약 관계를 끊은 채 바알의 종이 되기로 한다. 그 죄는 잿물과 비누로 씻을 수 없는 녹이나 얼룩과 같다. 그런데도 대놓고 “나는 순종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러고도 “나는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또, “나는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고 발뺌도 했다. 심각한 자아분열의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네 길을 보라”고 호소하실 정도였다. 자신을 모르니 누구의 말도 안 들렸다. 그냥 욕망덩어리일 뿐이다.
 
 
 
2.우상숭배에도 태연하다(23-25절)
태연하게 책망에 반항하고 우상숭배를 부정한다. 25절을 읽어보자.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하지만 이미 죄악에 중독되어 발정기의 암낙타처럼, 성욕에 눈먼 야생 나귀처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바알의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24절). “돌아서라”는 호소를 거부하고 “이방신을 사랑하니 그를 따라 가겠다”고 한다. 우리가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은 “생각 없이 하고 있는 것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욕망을 따라 우상을 향해 달려 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머릿속의 지식이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입술로는 바알을 쫓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도 발걸음은 ‘푸른 나무’ 아래로 향하고 있지는 않는가?
 
 
 
3.허망한 우상숭배(26-28절)
이런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것은 수치이다. 말로 꾸미고 궤변으로 감춘 그들 자신의 실상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28절을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왕, 제사장, 선지자, 족장들처럼 지도자들로부터 폭로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오면 그들이 진짜 의지했던 것이 무엇이고 그들이 등을 돌렸던 것은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그날에 성읍 수만큼 많은 우상들이 하나도 이스라엘을 돕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도 그들을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실 것이다. 되돌아보자 혹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적 우이독경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23-28절)
23절에서는 예레미야의 선포에 우상숭배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라고 지적한다. 28절에서는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친다. 살아온 삶의 흔적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골짜기’는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는데, 몰렉에게 제의를 드리는 제단이 있던 곳이다. 그곳은 인신제사를 행하던 곳이었다. 부모들의 안녕과 복을 위해 아이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고 불에 던져 넣은 곳이 다. 인간의 탐욕의 끝판왕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아이들을 불 가운데 스스럼 없이 던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가? 또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무와 돌로 만든 무수한 우상들은 피할 수 없는 증거들이다.
 
우이독경의 늪은 나의 만족과 유익, 욕심을 위해 낸 골짜기의 길, 만든 모든 우상들을 보고 깨닫는 것에서 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 마땅히 보고 깨달아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우상숭배자로 고발하는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우상숭배 금지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게 분명히 고백하며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스라엘은 멸망할 때까지 성전과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눈에 이런 모습은 바알 종교에 오염된 이교적인 경건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바알을 엄격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버렸다. 겉으로는 여호와를 경배했으나 실제로는 바알을 숭배한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이들이 부르는 여호와는 바알과 다름이 없었다. 예레미야가 고발한 우상숭배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면 “종교적 혼합주의”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서서히 물들었기에 바알화된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이를 인식할 수 없었다. 혼합주의라는 늪에 깊이 빠진 자들에게 예레미야의 고발은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혼합주의는 우리에게도 위협적이다. 우리에게 복음이 들어오기 전 한반도는 여러 종교가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일부 종교적인 요소는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와 사회 안에 완전히 용해되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자리 잡은 비기독교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 첫걸음이다.
 
-원래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다. 변질된 복음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부패를 초래한다. 교회의 부패는 다시 복음의 부패를 심화시킨다. 우이독경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네가 만든 네 신들(28절)”을 자각하여 철저히 구별해 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바알화된 복음, 십자가를 지고 자기희생의 길을 가신 예수를 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는가?
 
이스라엘이 마지막 순간까지 예언자의 고발에 귀를 막고 자기의 길을 참된 신앙의 길로 생각하고 가다가 멸망했음을 남의 이야기로 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이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하셨다는 식의 환상이 빨리 깨뜨려져야 한다. 우리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외함이 회복되어야 한다.
 
-먼저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인정해야 한다. 마 7:3-5절의 경고를 읽어보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나님과 우상은 함께 섬길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없다. 내가 만든 나의 하나님이 혹시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주님, 우이독경의 늪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듣고 깨닫는 것이 은혜임을 믿습니다.
*주님, 내 눈의 들보부터 살피겠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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