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을 향한 심판 [렘 2:29-37]
 – 2023년 07월 10일
– 2023년 07월 10일 –
앞서 우상숭배를 고발하신 하나님은 본문에서는 우상숭배 외의 죄악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심판을 선고하신다. 예레미야는 주전 62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요시아가 주전 639-609년에 통치했는데 이 시기는 기존 패권 국가였던 앗수르가 약화되고 있는 시기였다. 고대부터 애굽은 근동 지역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패권을 상실했다. 마침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되고 애굽은 근동의 지배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유다도 이런 애굽의 계획을 모르지 않았다. 주변 국가들과 연대하여 앗수르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결정적으로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의 메세지를 거부할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유다는 자신들이 무죄임을 주장한다. 기막힐 노릇이다.
 
우상숭배의 늪에 깊이 빠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는 거추장스러운 간섭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들을 폭력으로 제거해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강한 반역에 하나님께서 참담해 하시며 탄식하신다.
 
 
 
1.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29-35절)
하나님께서 당혹해 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책망하신다(29절).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항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맥을 따라 추론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자신들을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고 따진 듯 하다. 자신들은 바알들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는데도 환난을 당해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쳐도 구원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27절). 자신들의 더러움을 볼 수 없었기에(23절), 아무리 들려줘도 깨닫지 못했기에 재앙의 원인과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
 
우상숭배의 늪에 깊이 빠진 이스라엘은 거듭된 재앙에서 하나님의 교육적인 징계를 읽어낼 수 없었다. 자신들의 깨끗함을 철석같이 믿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은 하나님의 약속 위반이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들에게 거리낌없이 폭력을 행사하였다(30절). 더욱 완악해져가는 역설적인 현실에 하나님의 당황하심이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다.
 
하나님의 탄식이 고발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남편인 하나님께 결별을 통보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오래전에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잊지 못해 비통해 하신다. 광야의 짧은 신혼을 열정적으로 보낸 후에 남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애인들을 찾아 나섰다. 이스라엘이 직업적인 창녀보다도 더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대신에 우상을 찾아가는 길을 좋게 만들고 만다(33절). 우상과 사랑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상숭배는 사회 윤리적인 부패를 불러 왔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성전의 제사 종교와 가나안의 풍요제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윤리적ㅇ니 가르침은 영향력을 잃은지 오래였다. 이에 사회 윤리적인 타락이 가속화 된다. 경제적으로 연악한 자들이 탐욕스러운 강자의 부당한 폭력에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피를 흘리지만 누구도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고 강자의 폭력을 고발하지 않는다. 탐욕에 물든 강자들의 폭력애 공동체의 연대성은 사라졌다. 오직 개인의 탐욕이 판을 쳤다. 죄 없는 가난한 자의 피가 옷에 묻혀 있어도 이들은 나는 무죄하다고 주장한다(34-35절)
 
 
*후안무치하고 뻔뻔한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사망이 음침한 광양에서 안내자였고, 보호자 였으며 공급자이셨던 여호와를 망각한 채, 여호와 없이 자기 힘으로 해낸 듯 하난미의 개입을 거부한다.
 
*이는 결혼 예복의 장식을 소홀히 다룬 신부처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린 반역이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삶으로 가는 필수 단계에 접어 든 것이다.
 
 
 
2.애굽을 의지하는 이스라엘(36-37절)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골고루 이루어졌기에 정치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종교와 사회가 하나님을 떠났는데 정치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주변의 정치, 군사 강대국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했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권력에서 정치적인 구원자를 찾았다.
 
이런 배신은 첫째 계명을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성실하지 않았다. “길을 바꾸어 가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36절)” 끈임없이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했다. 이런 정책이 파국을 가져올 것을 이미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수치를 당한 것처럼, 애굽에게 수치를 당할 것이다(36절). 애굽이 이스라엘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는 망상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도 ‘머리 위에 양 손을 앉고 나올 것(수치, 사로잡힘을 상징)’이다(37절).
 
역사를 결정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통치 아래 있는 땅의 세력에게 의존하려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은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의존하려는 애굽을 버리셨기에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37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의 왕(10:7)이심을,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10:10)이심을 잊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다.
 
 
 
나는?
-적반하장이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는 자기 맘대로, 심판과 환난의 떄는 구원을 호소하며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무능을 탓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한 일은 망각한 채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도록 하나님께 요청하기만 한다.
 
-이스라엘은 결혼 예복의 장식을 소홀히 다룬 신부처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렸다. 그런데도 신랑되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만 기억했다. 이런 적반하장, 후안무치가 없다.
 
*가끔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이 기도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을 당당하게 외치면서 정작 일상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믿음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데에는 어떨까? 내가 당당하게 요청할 만큼 그만큼 하나님께 충실했을까?
 
 
-자기도취에 빠진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예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잊어버리고 이 나라 저 나라에게 사랑을 얻으려고 곱게 장식하고 기웃거린다. 발정난 들암나귀와 같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에 자비와 사랑, 온유와 헌신이 남아있을 리 없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과 도적질을 서슴치 않게 된다.
 
-그러면서 ‘진노는 내게서 떠났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선민은 절대 심판받지 않는다는 자기도취에 사로잡혀 우상을 섬기고도 하나님께 잘 드렸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기 자신도 잘 모른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적당히 분배하여 하나님을 섬기도 우상도 섬겼다.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착각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어떠한가? 적당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또 적당히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있지 않는가! 전심이 아니면 받아주시지 않고 전부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적당히 라는 말이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 말인지 깨닫게 된다.
 
*적당한(?) 종교의식이 악한 삶을 가리는 포장지가 되게 하면 안 된다. 죄책감을 무디게 만드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악인들보다 더한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무죄하다고 여겼다. 이는 속죄제를 정기적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전제사가 회개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헌금을 성실하게 드린다고, 일정한 시간을 사역에 할애한다고 우리의 악한 삶이 상쇄되지 않는다. 오직 회개의 은총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며,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빚어낸다. 일정한 종교형식을 준수하는 것의 편리함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오도하게 하는 치명적인 유혹을 잘 분별하여야 하리라.
 
 
-인과응보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이스라엘은 사랑을 얻으려고 곱게 장식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렸다. 바람난 사랑을 했다. 창기 같은 행위를 남에게 가르칠 만큼 능수능란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지도자들의 양심에 율법에 대한 존중과 이웃에 향한 자비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채 탐욕을 위해서 살인과 도적질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애굽과 앗수르를 오가며 사랑을 구걸하던(33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그들에게 번갈아가며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애굽을 버리시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
 
*세상을 의지하면 이와 같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안된다.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을 때 세상을 사랑한 백성들도 버림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만 믿고 살 수 는 없다며 나만의 대비책을 마련한답시고 세상과 그들의 악함과 손 잡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함께 심판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조금 벗어나도 안정과 평안을 위해 적당히 얼버무리며 작당하는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모습이다. 불신의 끝은 영원한 수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나안의 풍요가 광야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했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 시켜 버렸다. 가나안의 우상들을 숭배함으로 도덕적인 해이로 이어졌지만, 정작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하며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한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기회주의 대외정책을 펼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통해 수치를 당하고 형통하지 못하게 될 것을 강조하신다.
 
*적반하장, 자기도취, 후안무치한 이스라엘을 일꺠우기 위해 보낸 징계와 선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죽였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망과 저주의 하나님처럼 여겼다.
 
 
*혼합주의가 이렇게 무섭다. 세상과 적당히 섞이는 것에 무관심하면 그들과 작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생각하나, 결국 바알을 여호와처럼 섬기게 되었음을 교훈 삼아야 한다.
 
*교회를 여전히 출석하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삶이 이렇다. 신앙의 왜곡이 심해지면 하나님께 대하여 귀를 닫고 오히려 하나님이 부당하다며 대항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이단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정통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진다.
 
*교회 지도자들의 각종 범죄에 대하여 작당히 얼버무리려는 자정능력의 상실은 교회의 부패와 직결되었다. 개선과 개혁의 의지가 없는 현실이 좌절스럽기만하다. 그래도 이를 반면교사삼고 나에게 맡겨주신 교회 공동체만큼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세워 보려고 발버둥 쳐 보련다. 이것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므로 포기하지 않으련다.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징계에 무딘 삶을 말씀에 날선 삶으로 다듬어 보련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를 함께 내도록 해 보련다. 아무리 계산해도 세상의 방식이 훨씬 현실적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늘 삶으로 보여주며 살아 보련다. 세상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임을 믿는다.
 
 
 
*주님, 적반하장, 후안무치, 자기도취의 삶이 가져올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겠습니다. 더욱 겸손히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혼합주의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진심과 전심으로 주님 앞에 늘 서겠습니다. 말씀이 나를 지도하도록 날선 영적 감각을 다듬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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